한일 변호단, 소록도 찾아 한센인 가족 면담
청구 소송 '가족 증명하기' 난관
2021년 시작한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60명의 청구인이 아직도 '한센인 가족'과의 흔적을 찾고 있다. 면담 후 악수하는 '한국 한센 환자 가족보상 1호 청구인' 강선봉 씨(왼쪽 앞줄 세번째)와 오츠키 노리코(大槻倫子) 변호사. /소록도=김정수 기자 |
"지난 12년 간 냉각됐던, 특히 지난 정권에서 방치되고 단절된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가 복원됐다." 윤석열 정부는 자평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제3자 배상 등 미완의 한일 과거사는 여전히 정치적 난제로 남았다. 어디서 답을 찾을까? <더팩트>는 한일 변호단이 매듭을 풀어낸 '소록도 한센인 소송'에서 찾기로 했다. 한일 변호단은 2006년 일본 '한센인보상법' 개정부터 2021년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까지, 달걀로 바위치기 같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으며 아직도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3년 6월 다시 소록도에 모였다. <더팩트>는 이들과 일정을 함께하며 한일 과거사 문제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방향을 모색하고, 한센인을 향한 편견의 역사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소록도(전남 고흥)=박숙현·조채원·김정수 기자] 약 2분. 고흥반도 끝 녹동항에서 차로 출발해 1160m의 소록교를 지나 소록도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한센인 강제 격리 정책으로 세상과 단절됐던 이곳이 육지와 연결되기까지 무려 93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록도와 세상을 다시 이어준 건 다리만이 아니다.
15명의 한일 변호단(이하 '변호단')이 다시 소록도를 찾았다. 이들은 일본의 '한센인 가족보상법'에 따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한센병 환자 가족 보상 청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국립소록도병원 측에 자료 제공 등 협조를 구하고, 한센인 가족을 만나 진행 상황을 공유한 뒤 이들의 요청을 파악하기 위해 소록도에 온 것이다.
변호단 대다수는 2004년 한센인 보상 소송부터 함께해온 '팀'이다. 이번에는 '한센인 가족 보상'이라는 훨씬 어려운 과제를 떠안았다.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온 변호단이 자신들만 바라보는 한센인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지, 또 가족들은 이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6월 30일 오전 9시. 변호단과 취재진은 소록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이지만 섬의 99%가 국유지인 소록도는 현재 보건복지부 소속기관인 국립소록도병원(이하 '소록도병원')이 관리하고 있다.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고, 2016년에는 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이 개관해 관람객이 오갔다. 그러나 코로나19와 시설 정비 등을 이유로 2020년 2월부터 지금까지 소록도 방문객과 차량 출입은 전면 통제되고 있다. 이번 변호단의 방문은 사전 허가를 받아 특별히 허용된 것이었다. 인솔을 맡은 이정일 변호사는 "소록도 내에선 마스크를 꼭 착용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코로나 엔데믹 선언으로 마스크는 벗어던진 지 오래인 섬 밖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여기 자치회, 오랜만이네요." 약 6년 만에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는 오츠키 노리코(大槻倫子) 변호사는 낯익은 듯 옅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빗속을 달리던 버스가 한센병박물관 앞에 멈췄다. 처음 소록도 땅을 밟았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감회를 느낄 새도 없이 붉은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나와 반겨주는 이는 없었다. 한적함이 느껴졌다. 한센병박물관은 소록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한데 모은 곳이다. 1층 홀에서 변호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소록도병원 관계자와 전·현직 소록도 자치회장을 비롯한 주민 5명이 찾아왔다. 병원 관계자와의 면담은 15분 만에 끝이 났고, 곧이어 변호단과 한센인 가족 간 면담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 작업을 진행 중인 한일 변호단이 지난달 30일 소록도를 찾았다. 소록도는 2009년 소록교 개통 이후 차로 약 2분이면 고흥반도 끝 녹동항과 닿을 수 있다. /소록도=김정수 기자 |
◆밟힌 이의 흔적 찾기..."가슴 속 응어리 풀어달라"
한평생 차별과 억압에 짓눌려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했을 소록도 어르신들. 멀리서 날아온 일본 변호인들을 만나면 감사를 전하고 그저 그들의 말을 경청만 하지 않을까라는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오랜만에 변호인단을 만난 기쁨을 드러내면서도 진전 없는 소송 상황에는 씁쓸함을 내비쳤다.
"지금 신청해서 된 사람이 몇 명이고, 앞으로 할 사람이 몇 명이오?"
면담이 시작되지마자 강선봉(남·84세) 씨가 물었다. 그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한센 환자 가족보상 1호 청구인'이다. 그의 아버지 고(故) 강팔봉 씨는 1929년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소록도로 끌려갔다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소록도를 가까스로 탈출해 한센인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강 씨를 낳았지만, 후유증으로 해방 전 세상을 떴다. 아버지를 여읜 강 씨는 1946년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 소록도로 끌려왔다. 이후 소록도 환자지대 밖에서 떨어진 보육원에서 자랐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 역시 열세 살에 한센병을 앓았다. 강 씨는 오마도 간척사업에 동원됐다가 소록도를 떠났다. 40여년 간 틈틈이 긁어모은 자료로 지난해 보상받았다.
강 씨 질문에 오츠키 변호사가 손을 모으고 한껏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꺼냈다. 2021년 4월부터 시작된 한센인 가족보상 청구는 현재 148명이 신청했고 이중 28명(6월 말 기준)이 인정 받았다. 10명은 소송을 취하해 현재 남은 청구인은 110명. 소송에서 가장 큰 난관은 한센인 가족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일본 정부는 '행정 절차'상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보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남재권 전 소록도자치회장(남·82세) 말을 빌리자면 한센인과의 가족 인연을 증명하는 건 "바닷가의 금 줍기"와 같다. 차별과 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임을 감춘 탓이다. 소송을 시작한 지 3년째. 청구인 60명은 아직도 '흔적'을 찾고 있다.
한센인 자녀는 어린 시절부터 격리돼 부모의 행방을 모르는 경우도, 호적이 실제와 다른 경우도 부지기수다. 김윤임. 호적상 1947년 출생인 그는 실제로는 1944년생이다. 한센병에 걸린 그의 아버지는 고향 마을에서 소록도로 쫓겨나 호적까지 파였다.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던 부모님 밑에서 그 역시 어린 시절을 호적 없이 보냈다.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지내다 17세가 돼서야 할머니에게 통사정해 친할아버지 '양자'로 입적했다.
강 씨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밟힌 자는 밟힌 흔적을 없애고 생존 경쟁에 나가서 살려고 하니까, '안 밟혔다'라고 먼지라도 털고, 숨기려고 하고. 그렇게 세월이 흐른 지 1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호적) 찾아내라고 하면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호적을 만들고 족보를 찾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밟힌 흔적'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는 것을 그는 안다. 없는 자료를 찾는 일일 뿐 아니라 잊고 싶은 과거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 받았지만 이번 면담장에 나온 이유다.
일본 변호사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오츠키 변호사는 "일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분이 호적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편견, 차별이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국가와 사회에 의해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던 소록도라는 '모순'된 공간에서 수치적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일본 정부에 제대로 전달해 설득해내는 것. 여기 모인 일본 변호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강 씨도 조금은 마음을 놓은 듯했다. "변호사님들한테 말을 하니까 조금 속은 시원합니다. 사람들 표현을 못 하지만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을 겁니다. 그걸 좀 풀어주십시오." 마지막 당부와 함께 30여분 만에 면담이 끝났다.
변호단은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에서 한센인 가족들과 약 30분 면담했다. 한센인 가족임을 '증명'해달라는 일본 정부 요구가 한센인 가족들에겐 답답할 노릇이다. 일본 변호단은 면담 내용을 일본 정부에 잘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테이블 왼쪽부터 도쿠다 야스유키(徳田靖之), 오츠키, 쿠니무네 나오코(国宗直子), 아유쿄 마치코(鮎京眞知子) 변호사. 테이블 오른쪽은 강선봉 씨 등 소록도 주민. /소록도=박숙현 기자 |
◆하얀 사슴의 약속 "또 오겠습니다"
박물관 관람 시간을 틈타 <취재진>은 소록도 주민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오랜 세월 국가와 사회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았기에 경계심을 가질 거라 염려했지만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신이라는 듯 반갑게 맞아줬다.
강 씨는 "(면담에서) 말을 제일 많이 했어. 나는 일본 사람들한테 사정 없다"고 말했다. 이전 화상회의에서 답답한 나머지 일본 변호사들에게 날 선 말을 할 때면 한국 측 변호사들이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라고 진정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억울한 심정을 가장 잘 알아준 이는 같은 처지의 일본 한센인들이었다. 강 할아버지는 그들을 만나러 조만간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밟힌 놈은 흔적이 없다'고 하니까 일본 원고가 '잘한다'라고 하더라. 그들을 찾아가서 '참 당신 수고했소'라고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니겠나"라고 했다.
남 전 회장에게도 소록도에서의 삶을 물었다. 손마디가 없는 뭉툭한 그의 손을 보고 애써 놀란 기색을 감췄다. 그는 "소록도 역사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엄청난 아픔이 많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살았던 생활은 지옥이랄까…"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센인 당사자 못지 않게 가족이 받은 고통도 절절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05년 작성한 '한센인권실태보고서'에는 한센인 가족, 특히 자녀 인권침해 내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사회는 이들을 '미감아' 즉,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낙인 찍었다. 환자가 아닌데도 특정 수용시설에 모아 사실상 격리시켰다. 2000년대까지 비한센인 자녀 학부모들이 '한센인 자녀들과 내 자녀가 같이 공부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반발해 한센인 자녀들이 집 근처가 아닌 먼 중학교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게 도시에 나가 자리를 잡아도 차가운 시선은 따라붙었다. 한센인 자녀는 결혼할 때 대부분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나중에 부모가 한센인인 것이 밝혀져 이혼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혼하지 않더라도 가정 불화가 생기곤 했다.
소록도를 찾은 한일 변호단은 한센인 가족들의 요청을 묵묵히 들었다. 소록도 내 만령당을 보고 돌아가는 도쿠다 변호사, 조명래 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학예사, 박형석 소록도자치회장(왼쪽부터). /소록도=박숙현 기자 |
김윤임 씨는 18세의 나이에 홀어머니를 남겨둔 채 소록도를 도망치듯 나왔다. 그는 어린 시절 한센인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보육원에서 자랐다. 소록도 내 수탄장(愁嘆場)에서 한 달에 한 번씩만 멀찍이 떨어져 부모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별'은 반복됐다. 6살 때 아버지를 여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약한' 어머니와도 분리했다. 이후 소록도 교회 장로인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덕분에 배고픈 줄 몰랐지만 사춘기 소녀에게 부모님을 빼앗아간 소록도에서의 삶은 지겨웠으리라. 그는 육지 생활을 하면서도 소록도의 '소'자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쿵쾅했다고 한다.
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니 소록도 한센인의 고달픈 삶을 담은 '샌드아트' 영상이 상영 중이었다. 한센인 부부에게 자식이 태어났지만 함께 살지 못했고 아이가 육지로 나가면서 서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상영관 입구 쪽에서 물끄러미 스크린을 바라봤다. 박물관에는 종종 왔지만 이렇게 상영관까지 자세히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영상이 끝나자 너도나도 "잘 돼 있네"라며 박물관 시설에 만족해했다. 김 씨는 "아유 지겨워. 저거 보면 옛날 생각나서 마음이 안 좋아"라며 씁쓸히 뒤돌아섰다.
김 씨는 어린 시절 헤어진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당연한 사실을 '기억의 조각'에 빌려 겨우 '증명'해낼 수 있었다.
"너무 어려서 부모님하고의 기억이 거의 없어.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도 몰라. 그런데 딱 기억난 게 엄마하고 아부지하고 셋이 고구마를 캤어. 그때 아버지가 고구마 좋은 것만 나오면 (낫으로) 찍어버리는 거야. 못 팔아먹게. 엄마가 '이 좋은 걸 왜요?'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좋은 거는 우리 임이 줄 리 없고 당신이 팔아버리잖아'라고 했어. 그게 기억나가지고 변호사님들한테 얘기했더니 고구마 캘 때가 11월이라서 내 나이 6살이랑 해서 (자료에서) 찾았더니 딱 나왔어. 그걸 보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김 씨 이야기를 들은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는 "같은 시대인데 고생하셨다. 대단히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변호단의 가족 보상 청구는 '금전적 보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의 사죄에 더한 '당신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위로이다. 정부와 사회가 여전히 곳곳에 박혀 있는 차별의 시선을 걷어내고, 묵혀 있는 아픔을 함께 기억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남 전 자치회장은 "돈을 받는가 안 받는가는 많이 상관 안 해요. 그때의 어려운 시기에 당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사과한다는 뜻으로 하면 10원도 안 받을 겁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진심의 문제"라고 했다.
한센병 환자로 소록도에 강제수용 당했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이들은 화장돼 만령당으로 모인다. 한일 변호단에게 지난 20년의 보상 청구 작업은 어쩌면 한국 정부와 사회조차 외면한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소록도=김정수 기자 |
소록도에는 각자의 무덤이 없다. 한센병 '전염'이 두려워 시신을 모두 화장했기 때문이다. 생전 설움과 한을 풀지 못하고 떠나는데, 죽어서도 편치 않다. 한평생 핍박과 차별의 온전한 이유였던 몸에서 벗어나 한줌 재로 상자에 담긴다. 이런 유골함은 매년 10월 신생리 뒷산 중턱에 우뚝 서 있는 만령당으로 모인다. 이곳에서 10년 간 보관됐다가 가족들의 부름을 받지 못하면 만령당 뒤쪽 묘역에 함께 묻힌다고 한다.
한센인 가족 면담 후 만령당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도쿠다 변호사는 "소록도에 처음 왔을 때 하얀 사슴을 봤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소록도에선 햐얀 사슴이 귀해 마음이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쿠다 변호사는 이번의 짧은 방문이 못내 아쉬운 듯 "소록도에 또 오겠습니다"고 말했다. 한센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변호단은 그 누구도 들여다 보지 않았던 그들의 가슴 속 한을 이해하고 달래주는 하얀 사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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