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연대의 섬, 소록도 ①] "계속 싸우는 게 중요"…눈물 닦아준 한일 변호사들
입력: 2023.07.16 00:00 / 수정: 2023.07.17 20:44

일제 강제격리·인권침해 역사 담긴 비운의 섬 '소록도'
한일 변호단, '20년 소송' 과제 논의 위해 6월 '연대의 섬' 회동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왼쪽)와 조영선 변호사가 지난달 29일 녹동항 한 식당에서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일변호단 가운데 양국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이는 소수였다. 통역 한 사람에 의존했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깊은 진심을 나눴다. 모든 일정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녹동=김정수 기자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왼쪽)와 조영선 변호사가 지난달 29일 녹동항 한 식당에서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일변호단 가운데 양국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이는 소수였다. 통역 한 사람에 의존했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깊은 진심을 나눴다. 모든 일정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녹동=김정수 기자

"지난 12년 간 냉각됐던, 특히 지난 정권에서 방치되고 단절된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가 복원됐다." 윤석열 정부는 자평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제3자 배상 등 미완의 한일 과거사는 여전히 정치적 난제로 남았다. 어디서 답을 찾을까? <더팩트>는 한일 변호단이 매듭을 풀어낸 '소록도 한센인 소송'에서 찾기로 했다. 한일 변호단은 2006년 일본 '한센인보상법' 개정부터 2021년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까지, 달걀로 바위치기 같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으며 아직도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3년 6월 다시 소록도에 모였다. <더팩트>는 이들과 일정을 함께하며 한일 과거사 문제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방향을 모색하고, 한센인을 향한 편견의 역사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소록도(전남 고흥)=박숙현·조채원·김정수 기자] "히사시부리(오랜만이다) 녹동!"

6월 29일 오후 7시 반쯤 전남 고흥반도의 녹동항. 일본 고베에서 온 오츠키 노리코 변호사는 "몇 번이나 여길 오갔는지 셀 수도 없다"고 말했다. 유순한 인상에선 조용한 밤 항구 같은 차분함이 묻어났다. '일본 정부는 과거 부당한 격리·차별을 겪은 한센인과 그 가족에게까지 고스란히 대물림된 고통을 책임지고 보상하라!' 인간답게 살 권리를 뺏긴 한센인과 그 가족 대신 20여년 동안 일본 정부와 강단 있게 싸워 온 그다. 일본 정부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지만 이곳에선 '소록도의 천사'라 불린다.

한국 변호사 8명, 일본 변호사 7명이 이곳에 다시 모였다. 이유는 진행 중인 한센인 가족보상 청구 계획, 그리고 지난 20년 간 한센인 소송과 보상 청구 성과를 어떻게 책으로 정리해 펴낼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서다. 일본 한센인 보상법의 근거가 된 2001년 '구마모토 판결'부터 한국도 보상 대상에 포함된 2006년, 2019년 일본 '한센인 가족보상법' 제정에 따라 소록도 한센인 가족에게 첫 보상이 이뤄진 2022년까지. 가해국의 진정한 사죄와 법적 보상, 피해자들의 존엄 회복이 수반된 진정한 과거사와의 화해를 위해 한일 변호단은 20년 간 쉼 없이 달려왔다.

버스에서 줄지어 내린 한일 변호단은 녹동항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몇몇은 지난 날을 회상하는 듯 바다 건너 소록도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불과 1km도 안 돼보이는 거리. 물살이 세지도, 수심도 그리 깊어보이지 않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곳 녹동항은 소록도와 마주한다. 연륙교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저곳은 한때 절망의 섬, 천형의 섬이었다. 암흑이 깔린 밤, 혹독한 노역을 견디지 못해 소록도를 탈출하기 위해 맨몸으로 녹동항을 헤엄쳐오는 한센인을 떠올린다. 항구에 줄지어 대인 배, 섬에 우글거리는 나무, 옅은 파도에 일렁이는 밤빛, 그리고 녹동항에 모인 이들 모두 저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듯 했다.

전남 고흥 소록도 한센인들의 일본 정부 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한국 변호사 8명, 일본 변호사 7명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21년 시작한 한국 한센인가족피해자 소송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마가렛·마리안느 전망대에서 바라본 소록도와 녹동항을 잇는 연륙교. / 고흥=조채원 기자
전남 고흥 소록도 한센인들의 일본 정부 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한국 변호사 8명, 일본 변호사 7명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21년 시작한 한국 한센인가족피해자 소송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마가렛·마리안느 전망대에서 바라본 소록도와 녹동항을 잇는 연륙교. / 고흥=조채원 기자

◆ 전염·유전병 아닌데…무지·두려움 탓에 '악마화'된 한센병

"소록도는 일본이 조선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

한센인은 한센병에 걸린 사람, 혹은 걸렸던 사람을 말한다. 한센병은 쉽게 전염되지 않는 데다 항생제만으로도 완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병에 대한 무지가 낳은 두려움, 피부가 문드러지는 독특한 진행 형태 탓에 한센인들은 오랜 기간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았다.

한센인이 국가 관리 대상이 시작한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다. '일등문명국'을 자처하던 일본은 1907년 대외적 체면을 위해 떠돌던 한센인들을 강제로 요양소에 수용하는 법인 '나예방법'을 제정했다. 1915년에는 입소자에 대한 강제 단종·낙태수술이 시작됐고, 1931년에는 모든 한센인을 절대격리하는 개정 나예방법이 시행됐다. 한센병이 실체와 달리 제도로써 전염·유전병으로 공인된 셈이다.

일본 한센병 정책은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도입됐다. 평범한 섬이었던 소록도가 한센인 정착촌이 된 건 1916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 '자혜의원'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다. 가족의 외면, 이웃의 괴롭힘에 쫓기듯 소록도로 들어오는 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1935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개정 나예방법과 같은 조선나예방령을 공포한다.

1916년 소록도에 지어진 자혜의원의 현재 모습. 자혜의원은 1934년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갱생이란 마음이나 생활 태도를 바로잡아 본디의 옳은 생활로 되돌아가거나 발전된 생활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소록도=김정수 기자
1916년 소록도에 지어진 자혜의원의 현재 모습. 자혜의원은 1934년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갱생이란 '마음이나 생활 태도를 바로잡아 본디의 옳은 생활로 되돌아가거나 발전된 생활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소록도=김정수 기자

행정관청은 나예방 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나환자에 대한 업태 상 병독전파의 우려가 있는 직업에의 종사, 시장·극장 기타 대중이 집합하는 장소에의 출입을 금지할 수 있다. 행정관청은 나예방 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나환자를 조선총독부 나요양소에 입소시킬 수 있다. 조선총독부나요양소장은 조선총독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입소 환자에 대하여 필요한 징계 또는 검속을 할 수 있다.

조선나예방령 3조, 5조, 6조

조선의 한센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이중고를 겪었다. 적절한 치료보다는 굶주림 속에서 토목공사, 벽돌 제조, 전시물품 생산 등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가혹한 매질에 섬을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강제낙태·단종수술 같은 인권침해가 가해졌음은 물론이다. 한센인에 대한 처우는 해방 이후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센인 강제격리 제도는 1953년 한센병 치료제인 DDS가 도입된 후 전환기를 맞았고, 1963년이 돼서야 폐지된다. 그러나 1980년까지 강제낙태, 1992년까지도 단종수술이 이뤄졌다.

강제격리 정책의 폐지는 음성나환자에 대한 것이었고, 양성나환자나 장애가 있거나 외모의 변형이 심한 음성나환자는 계속 강제격리의 대상이었다. 정부는 이들에 대한 보호를 지속해온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어떠한 정책도 만들지 않았다. 사회복귀는 정상적인 노동력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음성나환자에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격리는 폐지된 적이 없다고 평가해야만 한다.

한센인의 격리제도와 낙인·차별에 관한 연구, 김재형, 2019. 2

차별과 편견은 문둥이의 자식, 한센인 자녀에게도 이어졌다. '미감아'라 불린 이들은 숫가락만 들 수 있게 되면 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보육원에 수용됐다. 부모가 한센병을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진학은 물론 직장, 결혼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낳아준 부모를 호적에서, 인생에서 지우는 일도 허다했다. 국가가 주도한 인권 유린에 숨죽이고 차별과 편견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한센인들을 섬 밖 세상으로 나오게 한 계기를 만든 건 일본 변호사들이었다. 구마모토 판결의 주역 도쿠다 변호사 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록도 주민 소송을 대리하기로 결심하면서다.

◆ "한국 변호인으로서 부끄러웠다"…'소록도 한센인'에 먼저 손 내민 일본 변호사들

"사실 일본 변호사님들이 처음 왔을 땐 결과에 대해 조금 부정적이었어요.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박영립 변호사)

2004년 5월. 도쿠다 변호사 등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광주·전남지부와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 소속 한국 변호사들의 도움을 구하러 찾아왔다. 박 변호사는 소록도 한센인 문제에 대해 일본 변호사에게 처음 들었을 때 '한국 변호인으로서 대단히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는 같은 해 7월 뜻을 함께하는 한국 변호사들과 '한센병 보상청구 한국 변호단'을 꾸려 소록도 한센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일제의 강제격리 정책으로 같은 피해를 봤는데 일본인만 보상하는 건 불평등하다' 일본의 식민지배 국가였던 대만도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5월 구마모토 판결 승소 현수막을 펴든 사코다 도키코 변호사(오른쪽). 소록도를 다시 찾은 그는 건배사에서 딸이 한국 걸그룹 르세라핌을 좋아한다며 어떻게든 사람들은 다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교도통신 갈무리
2001년 5월 구마모토 판결 '승소' 현수막을 펴든 사코다 도키코 변호사(오른쪽). 소록도를 다시 찾은 그는 건배사에서 "딸이 한국 걸그룹 르세라핌을 좋아한다"며 "어떻게든 사람들은 다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교도통신 갈무리

좌절의 시간도 있었다. 2005년 10월 도쿄지방법원은 소록도 갱생원에 격리됐던 한국 한센인 117명이 낸 보상요구 소송에서 원고 쪽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대만의 한센병요양소인 낙생원(樂生院)에 수용됐던 한센인 25명이 낸 소송에선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스스로에게 분하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한일 변호사들도 한동안 망연자실한 분위기였고요. 그런데 아유쿄 변호사 등 동료들이 '도쿠다 변호사님 우는 거 보러 여기 온 거 아니다, 변호사라면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더라고요. 나도 변호사인데… 정말 강한 사람들이죠. 순간 부끄러웠고 다시 열심히 싸워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도쿠다 변호사)

한일 변호사들은 낙담하기보단 더 강하게 뭉쳤다. 시민단체, 피해자들과 연대해 일본 정부 규탄집회 및 1인 릴레이 시위, 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수십 년간 스스로를 숨기고 가둬왔던 한센인들은 처음으로 그 모습을 온전히 대중 앞에 드러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암인(癌人)'이 아니듯 한센인 역시 '병적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한센인들의 용기, 한일 변호단의 헌신적 노력으로 2006년 한센인보상법은 한국인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하는 것으로 개정됐다. '보상법'이 만들어졌다는 건 법이 적용되는 대상에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법이 만들어진 게 끝이 아니었다. '한센인 입소기록' 같은 공식 문서가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진 것도 한국 변호사들이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다. 주말을 반납해 한센인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며 진술서를 썼다. 한센인 정착촌에 강제 억류됐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학적부, 교적부 등 기록이 될 만한 건 다 뒤지고 다녔다. 결국 2016년까지 한국인 590명, 대만인 29명이 800만엔(2016년 기준 약 8500만 원)의 피해 보상금을 받았다.

◆ 2019년 日법원 "한센인 가족도 배상해야"…韓, 2021년 가족 보상청구 시작

2019년 6월 일본 법원은 한센인 못지 않게 아픈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가족에게도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법원 판결은 같은 해 11월, 일본 정부의 한센인가족보상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여기도 난관은 있었다. 보상 청구인이 해방 전 태어났고, 청구인의 배우자·부모·형제 자매 등이 해방 전에 발병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한센인을 향한 멸시와 냉대 탓에 가족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살았던 이들이었다. 아버지 아닌 친척의 자식으로, '소록도 출신'임을 감추려 해방 이후 생년으로 호적에 오른 경우가 허다했다.

첫 한국 한센인 가족의 보상 청구는 2021년 4월 시작됐다. 그리고 한센인 가족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피해자들, 공식화한 증명 자료를 요구하는 일본 공무원을 향한 지난한 설득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올해 6월 기준, 신청자 총 148명 중 10명은 청구를 취하했고 28명은 보상받았다. 110명은 현재 자료 심사 중이거나 자료 미비로 아직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록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로 살아갈 수 있느냐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존경하고 배우며 열심히 같이 싸워나갑시다." (도쿠다 변호사)

"20년 전 소록도에 처음 왔었고, 오늘은 딸과 함께 왔습니다. 미래 세대와 이 문제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이어나갈지를 생각하니 희망이 보입니다. 민간 교류를 통해 이렇게 서로 연대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코다 마나부 변호사)

한센인 소송은 민간의 연대로 한일 양국 간 과거사 매듭을 풀어 낸 특수 사례에 꼽힌다. 식민지배 과거사를 바라보는 일본의 태도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서다. 이들은 상대 국가 변호사들이 물심양면으로 일해 준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게 전부일까. 한사람 한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왜 이 일을 하느냐고. 이들도 속으론 서로에게 묻고 있을까. 아니, 굳이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함께 소록도를 오간다'는 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1년 구마모토 판결 이후 한센인 가족들이 재판을 결의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이들이 새로 꾸린 가정의 구성원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꺼리는 건 일본도 같은 상황이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피해 입증 문제 때문이라도 '우리가 빨리 재판을 시작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변호사들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움의 주체는 역시 피해자들입니다. 싸우는 주체와 함께 가면서,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재판에선 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구니무네 변호사)

다음날 그들은 다시 소록도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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