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석] 한일 정상 히로시마 위령비 공동 참배의 '그늘'
입력: 2023.05.24 00:00 / 수정: 2023.05.24 00:00

경남 합천서 일본 간 14명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 '눈물'
국내외·세대 아우른 원폭 피해자 지원 확대되길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부부가 21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부부가 21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뉴시스

[더팩트ㅣ조채원 기자] 2023년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부부가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세워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통령의 참배는 이번이 처음이다. 윤 대통령이 이틀 전 만난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피해 동포 10명도 함께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같은 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경남 합천에서 일본에 온 14명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었다. 한국에 살고 있을 뿐 이들 역시 한일 정상과 함께했던 원폭 피해 동포들과 같은 피폭자들이다. 1972년 4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한국원폭협회) 발표에 따르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는 약 7만 명, 사망자는 4만 명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3만 명 중 2만 3000명은 귀국하고 일본에는 7000여 명이 남았는데, 귀국자 가운데 북한으로 간 사람은 2000명 정도로 알려졌다. 올 3월 1일 기준 한국원폭협회에 등록돼 있는 생존 피해자는 1877명, 평균 나이 80대의 고령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원폭 피해자로 인정돼 보건 의료비와 건강검진 등을 지원받는다.

한국원폭협회는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 건립을 계기로 일본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윤 대통령이 히로시마 위령비를 참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원폭 피해를 당한 지 78년 만에 한국 대통령의 위령비 방문, 게다가 일본 총리와 합동 참배가 이뤄진다는 것 자체에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그 '역사적 순간'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이들은 대표자 한 명만이라도 합동 참배와 간담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지난 4일부터 대통령실, 외교부, 해당 재외공관에 수차례 요청했다.

피해자들과 일본 일정을 동행한 유영희 한국원폭협회 사무국장은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그 이후 누구에게도, 아무런 연락 한 통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18일부터 20일까지 히로시마에 머물며 정부 측 연락을 기다렸다. 윤 대통령이 원폭 피해 동포들을 위로했던 19일, 이들은 히로시마 평화공원 통제선 너머에서 위령비를 바라보며 참배할 수밖에 없었다. 20일 오후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마음을 접고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유 사무국장은 "이번엔 힘들다, 다음 기회에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부 측 회신 하나만 있었어도 어르신들이 '나라에 또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라며 "서러움에 다들 엉엉 우셨다"고 전했다.

경남 합천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이 21일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제공
경남 합천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이 21일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제공

외교부 관계자는 '협회 측 문의가 있었느냐'는 <더팩트>의 질문에 "확인해 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히로시마에 계신 동포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위로하고 실제로 이 위령비를 설립하고 이설하는 데 기여한 현지 동포 사회를 격려하고자 한 게 최우선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해도 한국에서 온 피해자들 요청에 '무응답'이었단 점은 아쉽다. 오랜 기간 한일 양국 정부에 외면받으며 원폭 후유증과 빈곤,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살았던 피해자의 상처를 두 번 헤집는 일이었다.

정부 차원의 원폭 피해자 지원은 2016년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하고 나서야 법제화됐다. 이 법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 △의료 지원 △피해자 추모 기념사업 실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에 따라 2019년 정부 차원의 피해자 실태조사가 실시됐다. 그러나 생존 피해자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차원이지 전체 원폭 피해자 규모를 파악하는 전수조사 개념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법엔 방사능 유전이 의심되는 장애나 질병을 앓고 있는 피해자 자녀 등 2, 3세에 대한 지원은 빠져 있다. 매년 약 10만 건,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의료비를 수령할 수 있도록 청구를 돕는 인력에 대한 운영비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기시다 총리는 16일 각의에서 자료 수집이 어려워 외국인 원폭 피해자 규모를 조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 정부라도 나서서 지금부터라도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진정성 있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디에 살건 몇 세대를 지났건 원폭 피해 사실이 확인된다면 적절한 의료 지원과 보상을 받을 수 있고, 희생자들에 대한 온전한 추모가 이뤄질 수 있도록 법·지원 체계 마련에 힘써야 할 때다.

"말 위주로 해 왔던 과거사 해결(노력)을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대통령실 자평에 걸맞은 후속 조치를 기대한다.

chaelo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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