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통지·합사동의 없이 한인 2만1천여명 야스쿠니 신사에
'제국 병사'라며 전쟁 끌고가놓고…전후보상엔 "너흰 한국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2021년 8월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위한 공동행동 주최 8.15 광복 76주년 맞이 일제 강제동원 사죄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
[더팩트ㅣ조채원 기자] 경기도 강화군의 이사현(李思炫)은 아내와 돌이 갓 지난 딸을 둔 가장이었다. 스물 셋이 되던 1944년 2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징용 영장을 받았다. 식량 수탈과 강제징용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던 때였다. 그가 가지 않으면 집성촌에 함께 사는 가족들까지 괴롭힘을 당할 게 뻔했다. 병참부대 군속으로 편입된 그는 1945년 5월 중국 광시성 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그 해 6월, 광시성 한 병원에서 파상풍으로 죽음을 맞았다. 중국 베이징에서도 약 2300km 떨어진 이역만리 타국에서다. 사망 후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유족들은 이 씨의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신사 합사 역시 유족 동의 없이 진행됐다. 유족들은 1992년이 돼서야 이 씨의 사망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1971년 한국 정부에 보낸 기록물 '피징용 사망자명부'를 통해서였다. 이 씨가 강화를 떠나 사망하기까지 행적을 좇던 유족은 1996년 일본 정부가 1993년 10월 한국 정부에 제공한 유수명부(일본 후생성이 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행방불명된 16만148명의 조선 군인·군속 등의 신상을 담은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명부 속 이 씨의 창씨 이름, '이원사연'(李原思連) 옆에 적힌 합사제(合祀濟). 이 씨의 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협의회) 공동대표가 아버지의 야스쿠니 합사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다. 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전쟁을 일으킨 자들과 함께 신으로 모셔진다니,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 대표는 멋대로 아버지 인생을 모욕한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일본 변호사, 한일 시민단체와 함께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회' 소송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 2만1000여 명의 이사현, 60여 명의 김희종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 의한 '공무사'로 인정한 사람만을 합사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 전체 합사자 246만여 명의 90%는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다. 조선인의 경우 이 씨처럼 군인, 군속으로 동원됐다가 사망한 이들이다. '하나 뿐인 생명을 조국의 평화와 영광을 위해 바쳤다'는 명분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무수한 생명이 스러진 데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야만적인 인적·물적 수탈이 이뤄진 침략전쟁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의 평화와 영광을 위한 전쟁'으로 여겨진다.
합사는 한국 정부나 한국인 유족에게 알리거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뤄졌다. 합사 여부도 강제동원 명부에서 '합사제' 표시를 확인한 유족들이 야스쿠니 신사 측에 문의하는 형식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무단으로 신사에 합사한 한국인은 약 2만1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야스쿠니 신사는 후생성이 제공한 자료를 근거로 합사를 진행했는데, 후생성이 제공한 한국인 자료는 2만692명분이었다. 연도별로는 1959년 1만9650명, 1964년 82명, 1972년 66명, 1973년 385명, 1975년 509명 등이다. 해방 한참 이후에도 합사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김희종 씨(오른쪽 두번째)가 2007년 2월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씨는 2016년 5월 고인이 됐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살아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합사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그 대상도 무려 60명이나 된다. 1925년 황해도 황주군에서 태어난 김희종 씨는 1944년 4월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늑막염에 걸려 학업조차 포기해야했던 몸 상태였다. 사이판으로 끌려간 그는 매일 땅굴을 파거나 벽을 쌓는 막노동을 해야 했다.
그는 미군 공습으로 포로가 돼 미국 위스콘신 주까지 끌려갔다가 1946년 귀국했다. 평범한 삶을 살던 김 씨는 2006년이 돼서야 자신이 사이판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됐고, 창씨개명 이름으로 신사에 합사돼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찾아가 합사 철회를 요구했다. 죽은 사람이 아니니 제사 지내지 말라는 상식적인 요구에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 '조사 부족으로 전사자로 오인됐다, 그래서 제신명부에 생존확인이라고 기재했다'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위패나 유골은 대신 합사자들의 이름이 적힌 세 개의 명부가 있다. 하나는 영세부봉안전이란 곳에 있는 신사가 신으로 모신다는 246만 명의 명부인 '영새부'(靈璽簿), 두 번째는 제사자 명단인 '제신부'(祭神簿), 사망자의 사망일 등 신상을 기록한 '제신명표'(祭神名票)다. 야스쿠니 측은 '신사는 어디까지나 전몰자의 혼을 모시고 있다'면서도 모든 명부에서 이름을 빼 달라는 김 씨의 요구을 거부했다. 김 씨는 2007년 2차 합사 철회 소송에 참여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2006년 7월 15일 합사 철회를 요구한 김희종 씨에게 보낸 회신(왼쪽)이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조사 부족으로 전사자로 오인됐다, 그래서 제신명부에 생존확인이라고 기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조채원 기자 |
◆ 합사할 땐 '우리 일본인'…전후보상·예우엔 '너흰 한국인'
"전쟁터에서 '일본인으로서 싸웠다'고 강조하고 싶다면 우선 일본인 유족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통지조차 없었습니다. 일본인의 경우 전사 통지가 유족에게 전해졌으며 상당한 금액의 보상도 이뤄어졌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합사할 때에는 가족들이 반대하고 있는데도 '옛날에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라며 멋대로 일본인 취급하면서 보상과 원호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다'라며 배척하고 있습니다."
- 2009년 1월 10일 2차 소송 고인형의 진술서
1946년부터 군인, 군속 미귀환자 조사를 시작한 일본 정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후 본격적으로 생사불명자의 사망 통지와 유골 수집을 추진했다. 1953년부터는 해외 격전지에서의 일본인 전몰자(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 유골을 체계적으로 조사, 송환해 왔다. 일본인 유가족에게는 사망증명서와 전사통지서를 보냈고, 그에 따른 원호조치를 취했다. '전상병자 전몰자 유족 등 원호법'에 따라 전몰자 유족에겐 재직기간, 계급, 봉급에 관계없이 같은 금액의 유족연금과 위로금이 지급됐다.
그러나 이 모든 보상에 한국인과 대만인은 해당 사항이 없다. '제국의 병사로 자부심을 갖고 천황을 위해 기쁘게 죽으라'며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일본정부는 조선인과 대만인은 보상과 원호 대상에서 제외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이후 일본 국적이 박탈됐다는 게 그 이유다. '전사했을 때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일본인으로 신사에 모셨다'는 주장과 상반된 태도다. 조선, 대만의 청년들은 오직 무단 합사를 정당화하는 논리에서만 일본인 취급 당하고 있다.
2021년 4월 21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방문객들이 참배하는 모습. / AP=뉴시스 |
일본정부 차원의 전사자 유해 수색·발굴 노력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인 유골 문제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게 일본 정부 입장이다. 일제 때 국외로 강제동원됐다가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20여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1946년 이후 2019년까지 한국으로 봉환된 유해(위패 포함)는 1만 1000여 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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