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고삐 풀린' 정당 현수막..."도시 공해" 피로한 시민들
입력: 2023.03.10 10:17 / 수정: 2023.03.10 10:17

옥외광고물법 개정 후 갯수 더 많아지고 자극적 문구 가득
현수막 전쟁, 현실적 제재 장치 없어…규제 나선 지자체


최근 국회의사당 앞 횡단보도 거리 부근에 걸려 있는 여·야당의 정당 현수막. 자극적인 정쟁성 문구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송다영 기자
최근 국회의사당 앞 횡단보도 거리 부근에 걸려 있는 여·야당의 정당 현수막. 자극적인 정쟁성 문구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송다영 기자

[더팩트ㅣ국회·신촌·홍대=송다영 기자] "다짜고짜 상대 당 의원을 호명하면서 화내는 현수막 같은 건 보기만 해도 시끄러워요."

최근 전국 대로변에 각 정당이 걸어둔 현수막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현수막 실소비자인 유권자들은 상대 당 비난만 가득한 현수막 전쟁에 "짜증난다"며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정치권에선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게재를 막을 제재 장치는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올해 들어 격렬해진 여야의 '현수막 전쟁'은 지난해 12월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불이 붙었다. 정당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신고나 허가 없이 현수막을 설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수막 개수 제한도 사라졌고, 각 정당은 최대 15일까지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게 됐다.

<더팩트>가 지난 7일 국회의사당 앞과 유동인구가 많은 신촌, 합정 일대를 살펴본 결과, 여야의 정쟁성 현수막이 걸린 모습을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

대학가 신촌역 인근 교차로에는 국민의힘의 정당 현수막이 6개 넘게 걸려있다.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송다영 기자
대학가 신촌역 인근 교차로에는 국민의힘의 정당 현수막이 6개 넘게 걸려있다.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송다영 기자

7일 오후 2시께 서강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 등이 가까운 신촌역 회전 교차로(로터리)에는 원형으로 국민의힘의 정당 현수막이 횡단보도를 둘러싸고 6개 넘게 걸려 있었다. 주된 내용은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와 관련해 민주당이 '방탄 정당'이라는 비난이다.

원외정당이 여당에 맞대응하는 현수막도 볼 수 있었다. 신촌역 2번 출구 인근에는 국민의힘의 현수막과 진보당의 현수막이 위아래로 걸려있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신조어를 넣어 '건폭노조(건설노조+폭력배의 합성어) OUT'이라 쓰인 현수막을 걸었다. '금품요구' '채용강요' 공사방해' 문구 뒷배경에는 더불어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넣기도 했다. 이에 손솔 진보당 서대문구위원회 공동위원장은 바로 아래에 '검찰왕국 OUT'이라는 문구를 새긴 현수막을 달았다. '학폭무마' '요직독식' '편파수사'라는 글씨 뒷배경으로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었다. 진보당 관계자는 "정권의 정치적 반대세력과 민주노총, 건설노조에 대한 표적 수사에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며 "검찰왕국, 검찰독재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고민을 담아 풍자를 넘어 절박함이 담겨 있는 현수막"이라고 설명했다.

합정역 앞 교차로에서도 여야의 '현수막 전쟁'을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는 김성동 국민의힘 마포 당협위원장 이름으로 '민주당이 정쟁에 몰두할 때 국민의힘은 민생에 집중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반면 바로 옆에는 정청래 민주당 의원의 이름으로 '정순신 학폭·곽상도 50억 검사 아빠 전성시대'라고 쓰인 현수막이 자리했다.자극적인 문구를 담은 현수막에 반해 시민들이 보인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인근을 지나는 행인들은 대부분 현수막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들의 행선지를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사이좋게 나란히 여야가 서로를 비난하는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같은 길에 걸어놨다. / 송다영 기자
'사이좋게 나란히' 여야가 서로를 비난하는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같은 길에 걸어놨다. / 송다영 기자

여야가 경쟁하듯 서로를 비난하는 날 선 문구를 새겨 길거리에 걸어두자 정치권 안팎으로는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길에서 만난 시민들은 거리의 정당 현수막이 정치 피로를 유발하고 그들에게 불편을 초래한다고 했다.

20대 대학생 A씨는 거리의 정당 현수막이 '도시 공해'라고 입을 뗐다.

"현수막 문구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시선이 안 갈 수가 없죠. (보면서 드는 생각은)'그래서 당신은 누구시죠?' 싶어요. 그리고 가끔 영혼없는 문구들 보면 '그래서 어쩌라고' 싶어요. 예를 들어 '부동산 해결하겠습니다!' 같이 영혼 없는 문구를 보면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데' 생각이 들죠. 다짜고짜 상대 당 의원을 호명하면서 화내는 현수막 같은 건 보기만 해도 시끄러워요. 평화롭게 산책하다가 별안간 혼내는 현수막 보면 짜증 납니다. 선거철도 아닌데 정치인들이 마이크 잡고 동네 떠나가라 하는 소리를 현수막으로까지 걸어놓으니 피로해요."(A씨)

30대 회사원 B씨도 "선거철에만 서로 비방하는 현수막이 반짝 걸리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현수막 처리하는 구청도 피곤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로 자동차로 출근한다는 30대 C씨도 "현수막 때문에 지나가는 차량이 안 보여서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치인이 총집결한 국회의사당 앞은 '현수막 대전'이 더 치열하다. 국회의사당 앞 횡단보도 양 옆에는 각 정당의 현수막으로 뒤덮혀 있다. 최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를 차용한 현수막을 내걸었다.

최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를 차용한 현수막을 내걸어 서로를 비난하는 문구를 앞세웠다. /송다영 기자
최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를 차용한 현수막을 내걸어 서로를 비난하는 문구를 앞세웠다. /송다영 기자

국민의힘은 현수막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을 꼬집어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지'라는 문구를 새겼다. 반면 민주당은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으로 자진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를 직격했다. 민주당 현수막에는 '정순신판 더 글로리 연진아, 네 아빠도 검사니?'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현수막에 상대 정당의 고유색, 글씨체를 그대로 갖다 쓰기도 한다. 검정 배경색, 흰 글씨로 쓰인 '더글로리' 드라마 대사, 글씨 뒤로 붓칠하듯 남겨진 상대 정당의 색까지 현수막 디자인이 상당히 유사했다.

한 정당 관계자는 "각 정당 홍보국에서 현수막 문구, 디자인 등을 담당한다"며 "(최근에는 여야 정당이 현수막 문구를) 서로 베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게시에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원욱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회 앞 현수막 사진과 함께 "부끄럽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민생은 사라지고 증오와 정쟁의 깃발만 가득하다"며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서민의 삶은 방향을 잃는다. 조타수가 되어야 할 국회가 오히려 바다 한가운데서 닻을 내리는 경우"라고 정쟁을 일삼는 국회를 비판했다.

정당 현수막이 걸려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달 인천 연수구에서는 야간에 전동킥보드를 타던 20대 여성이 정당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현수막이 성인 목 높이 정도로 낮게 설치돼 있었고, 어두운 탓에 끈을 미처 보지 못해 이러한 사고가 났다고 전해졌다.

당직자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쟁성 현수막 게재에 회의감을 보였다. 보좌진 D씨는 양당의 '더글로리' 현수막을 예로 들며 현수막 문구에 '언어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더글로리' 드라마 내용이 과거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복수하는 내용이고, 드라마 초반에는 그 피해자가 학폭 당하는 모습이 잔인하게 묘사돼 있기도 하거든요. 정당 현수막을 보면서 '누군가는 저 현수막을 보면서 자신의 힘겨웠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현수막이니까 눈길을 끌어야겠고, 최신 유행 드라마 대사를 쓰는 것 다 알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또 사람들 눈에 들기 위해서 자극적이고 혐오적인 문구를 '알면서도' 쓰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D씨)

보좌진 E씨는 현수막 문구 탓에 지역민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게 나라냐'라는 문구를 쓴 현수막을 게재했을 때 '그러면 지금 내가 나라도 아닌 데서 살고 있다는 거냐. 비판도 적당히 하라'는 당원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다만 중앙당으로부터 게시 요청이 내려오는 현수막의 경우, 지역구에서는 안 달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보좌진 F씨는 "(현수막의 경우) 중앙당에서 시도당과 각 지역위로 내려오는데, 공천을 생각하면 결국 '자유 게시'라고 쓰여 있긴 해도 게시할 수밖에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보좌진 G씨도 "선거철엔 그렇다 치고 정도껏 해야지 요즘은 현수막 게시 요청이 너무 자주 들어와 지역 보좌진들도 할 일이 많아져 난감해한다. (현수막을 달기만 하면 끝이 아니라) 떨어지면 다시 달라고 당원들이 의원실로 전화가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당 현수막의 게재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당직자들 중에서는 현수막의 '각인 효과'를 언급했다.

정당 현수막의 게재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당직자들 중에서는 현수막의 각인 효과를 언급했다. 사진은 국회 앞 횡단보도에 걸린 여야의 정당 현수막 모습. /송다영 기자

정당 현수막의 게재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당직자들 중에서는 현수막의 '각인 효과'를 언급했다. 사진은 국회 앞 횡단보도에 걸린 여야의 정당 현수막 모습. /송다영 기자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현수막으로 정치권 현안을 보여주는 게 가장 직관적이죠. 현수막을 보고 '아 이제 선거철이구나'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노년층분들에게는 현수막이 소통하는 제1의 창구이기도 해요."(보좌진 H씨)

"지지자들에게는 현수막이 소구 효과가 확실히 있어요. 반대 당 현수막을 보고 의원실에 '저쪽당은 저런 거 한다면서 현수막 다는데 우리당은 뭐하는 거냐'면서 항의 전화하는 분도 계십니다." (보좌진 I씨)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을 한해 앞두고 앞으로 여야의 정당 현수막이 거리에 더 들어찰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7월 '선거일 180일 전부터 현수막 등의 설치를 금지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제90조(시설물설치 등의 금지)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게재를 막기 위한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2월 법 개정으로 '정당 현수막 설치 및 관리 가이드라인'을 각 지자체에 배포했다. 가이드라인은 현수막이 '통상적 정당 활동'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모호한 경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하도록 했다.

하지만 선관위 측에서도 정당 현수막을 게시하는 정당 측의 문의가 없으면 개입은 힘들다는 입장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언급했다. 이어 "현수막 문구의 경우 '정당 활동의 범위'에 들어가면 선관위에서는 제한하고 있지 않다.(선관위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설명했다.

난립하는 현수막을 제재하고자 전국의 지자체들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서울시는 지난 6일 국회와 정부에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개정을 건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같은 날 울산광역시도 5개 구·군과 함께 정당 현수막의 난립을 막기 위한 세부 기준 마련을 행정안전부에 공동 건의한다고 전했다.

manyze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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