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대미편향성 더 심해져…중국 간과 말아야"
"美, 한일갈등 원치 않아…친미 하다간 일본 밑으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도가 높아 우려된다고 보았다. 그는 동아시아 패권이 언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르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23일 강남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하는 정 전 장관. /강남=이동률 기자 |
[더팩트ㅣ강남=조채원 기자] "미-중 각축전이 계속되는 시기입니다. 동아시아 패권이 어디로 옮겨갈 줄 알고 미국에만 바짝 붙고 있습니까."
최근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잇따르며 한반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해관계가 엉켜있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키고 평화적 남북관계 모색을 위한 혜안이 절실한 때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살 길은 무엇일까.
외교학을 전공한 정치학 박사이자 김영삼 정부 대통령비서실 통일 비서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제정치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몸담아 온 정세현 전 장관은 '자국 중심성'으로 이 난제를 풀어나간다. 그는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한 커피숍에서 약 1시간 반동안 진행한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우리 실속 차리는 우리 외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잡 다난한 한국 외교사를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쉽게 풀어나가면서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김영삼 정부 시절 통일비서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차 북핵위기를 계기로 한국 외교의 대미 추종성에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최대 피해자는 우립니다. 그런데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니 어느나라 외교부인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정부가 자기 중심성 있는 정책을 개발해 미국과 협의하고 북한과 협상하기보다는 미국이 짜놓은 프레임만 따라가더라는 거에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3일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우리 외교부의 대미 추종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동률 기자 |
정 전 장관은 한국 외교가 대미 종속성에 빠진 이유를 삼국시대에서 한국 근현대까지 이어졌던 '상국 모시던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과거 중국을 모시던 조선시대 사대주의적 문화가 해방 후 맺은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까지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 정부 들어 대미편향성이 더 심해졌다"며 "미국 말만 듣는 외교로는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이 요원한 데다 한국이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과의 대화를 우선한 전임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외교안보정책 기조로 삼고 있다.
"미국은 한미일 3국이 스크럼을 짜고 중국을 압박하길 원합니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선 한국과 일본이 싸우길 원치 않아요. 한국과 미국보다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더 긴밀한 이상, 일제 강제징용 배상이나 위안부 같은 과거사 문제 같은 건 '해결됐다고 치고' 싶을 겁니다"
정부는 행정안전부 산하 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을 가지고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일본 피고기업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상 재원 기여와 사과 등 일본의 정치적 결단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경험이 있는 일본은 한국을 동등한 상대로 대할 생각이 없어 보여요. 결국 일본은 미국이 갑, 일본이 을, 한국이 병인 위계를 만들고 놓고 동아시아에선 미국의 지위를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외교가 미국 중심으로 끌려다니는데,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겠어요? 친미(親美)하다 종일(從日)로 빠질까 걱정돼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대한민국 외교의 자국 중심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담은 저서 '정세현의 통찰'을 펴냈다. / 이동률 기자 |
그렇다고 미국과 거리를 두란 말은 아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목적을 미국이 불리한 약속도 지키도록 하는 것으로 삼아야 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으로 중국과 훨씬 밀접하게 연결된 상황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는 충고다.
최상목 경제수석은 지난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의에 참석하며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발언했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 등으로의 시장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중국의 반발을 부를 만한 것이었다. 정 전 장관은 8개월 연속 대중 수출 감소, 올해 1월 대중 무역적자가 39억7000만 달러로 월간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이 현 정부의 '대미편중, 대중적대' 외교 정책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안보는 미국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경제는 중국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현 정부는 나토 가서 '탈중국'을 외쳤어요. 필요하면 중국도 써먹고 미국도 써먹고 해야죠. 중국과의 관계를 최소한 문재인 정부 시절만큼은 복원해 대중무역적자를 줄여가야 합니다. 그래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도 이끌어 낼 수 있어요."
청년들의 통일 교육을 중시해 온 정 전 장관은 북핵문제를 풀어낼 또 다른 시각도 제시했다. 그는 1민족, 1국가, 1정부, 1체제라는 기존 통일 개념에서 벗어나 남북 군사적인 긴장 완화, 자유로운 인적·경제적 교류를 현실적인 '통일'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안보는 미국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경제는 중국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현 정부는 나토 가서 '탈중국'을 외쳤다. 필요하면 중국도 써먹고 미국도 써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률 기자 |
"무작정 하나 되자고 하기보다 남과 북을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면 돼요. 3만 7000원짜리 스테이크를 사 먹을 수 있는 형과 1300원짜리 삼각김밥도 제대로 못 사 먹는 동생이 어떻게 살림을 합칩니까. 북한의 남한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북한은 우리를 도발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유럽연합 같은 '남북 연합'을 지향하며 군비경쟁을 멈출 수 있는 틀을 먼저 짜야 해요. 지금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 미국의 확장 억제를 북의 군사적 위협에서 한국을 지킬 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전략자산 하나 뜨는 게 얼만데 미국이 자기 생돈 써 할 리가 있나요. 외교에 공짜 절대 없어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누구? 1945년 북만주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외교 관련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11월 국토통일원에 들어간 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세 정부에 걸쳐 청와대 통일비서관과 통일부 차관·장관을 역임했다. 1993년 1차 북핵위기 이후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그리고 국제정치'가 30년 째 그의 화두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 시절 남북회담을 95회나 지휘했고 1971년 이래 남북간에 체결된 143개 합의 중 73개가 그의 손을 거쳤다. 당시 개성공단 착공과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연결사업을 이끌어 내 남북관계 개선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