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 불발, 한일 비공개 회담 "바이든 일정 변경 탓"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양 정상의 환담은 48초가량 진행됐다. /뉴시스 |
[더팩트ㅣ허주열 기자] "미국·일본과는 양자 (정상)회담을 하기로 일찌감치 서로 합의해 놓고 일정을 조율 중이다. 빡빡한 일정이기 때문에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진행하는 '양자 회담'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윤석열 대통령 영국·미국·캐나다 순방 관련 15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발언)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두 번째 해외순방에서 한미·한일 정상회담을 자신했던 대통령실의 구상이 제대로 꼬였다. 한미 정상회담은 '48초 환담'을 포함해 다수 정상이 참석한 행사에서 양 정상이 세 차례 짧은 환담을 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한일 정상회담은 비공개로 30분간 진행된 가운데 우리는 '약식 회담'으로, 일본 측은 '회담이 아닌 간담'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일정 변경 여파로 '플랜B'를 가동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22일(이하 현지시간) 자정 현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런던 및 뉴욕 방문 계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바이든 대통령과 회동했다"며 "18일 런던에서 개최된 찰스 3세 국왕 주최 리셉션, 21일 뉴욕에서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와 바이든 대통령 내외 주최 리셉션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만나서 미국 인플레감축법(IRA), 금융 안정화 협력, 확장 억제와 같은 주요 현안에 관해서 협의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미 인플레감축법에 대한 우리 측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하고, 한미 간 계속해서 진지한 협의를 이어 나가자고 했다. 또한 양 정상은 필요시 양국이 금융 안정을 위한 유동성 공급 장치를 실행하기 위해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한미 정상회담은 불발됐지만,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세 차례 짧은 만남을 하면서 한미 현안에 대한 밀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과 세 차례 만났지만, 각 환담이 생각보다 짧았다. IRA에 대한 우려 전달 같은 것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소개해 달라'는 순방 기자단 질문에 "두 분이 만난 총시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양측에서 IRA, 통화스와프, 확장 억제 이런 문제에 관해서 양측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집중적인 검토를 지시했다"며 "바이든 대통령의 뉴욕 일정이 줄어서 윤 대통령이 말하고, 또 바이든 대통령 역시 압축해서 의견을 말해서 양측 NSC 간에 검토했던 사안에 대해서 확인이 이루어졌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바이든 대통령의 뉴욕 일정이 변경되지 않았으면 충분히 한미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으나 여의치 않아 일종의 플랜B를 작동하게 된 것"이라고 부연했다.
윤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 측의 발표는 우리 측 발표와 달랐다. 백악관 측은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긴밀한 협력을 계속해 나간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 또 양 정상은 공급망 회복 탄력성, 핵심기술, 경제 및 에너지 안보, 세계 보건 및 기후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우선 현안에 대한 지속적인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양 정상 대화 결과에 대한 양국의 발표에 차이가 난다'는 지적에 대해선 "백악관에서 낸 건 리드아웃이라 해서 아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라며 "우리 측은 선제적으로 이러이러한 문제에 대해 백악관 쪽에 동의, 합의를 이끌어낸 상태였기 때문에 발표문을 그보다 상세하게 낸 것"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약식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
한일 회담은 이날 오후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주최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친구들' 행사가 열린 뉴욕의 한 콘퍼런스 빌딩을 찾아가서 비공개로 30분간 진행됐다.
회담이 진행된 장소에는 정상회담 시 준비되는 양국 국기 등도 없었고, 한국 취재진은 한 명도 입장하지 못했다. 이에 대통령실 측은 "약식 회담이 비공개로 열렸다"고 했으나, 일본 측은 "회담이 아닌 간담"이라고 평가했다. 양국 간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의견 접근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시다 총리와 현안을 해결해서 양국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했는데, 현안에 과거사 문제가 포함이 됐는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논의됐는지 말해 달라'는 질문에 "한일 현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 양국이 집중하고 있는 현안은 강제징용 문제"라고만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일본 측이 회담을 '간담'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선 '사견'임을 전제로 "제 추측으로는 일본이 조심스러운 거 같다"며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큰 틀에서는 일본도 공감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뤄나가는 과정에서 기대 수준을 낮춰 나가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이런 일본의 입장이 투영된 게 아닌가 추측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미일 정상회담부터 시작해서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 하고 싶은 나라가 얼마나 많겠나. 그게 어그러지면서 어떻게 보면 연쇄, 파상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까 한일 정상회담도 상당히 불투명해진 가운데에서 어떻게 보면 급작스럽게 일정이 잡히다 보니까 약식 회담의 형식을 띠게 됐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의 해명을 종합하면, 한미·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당초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윤석열 정부의 실수나 문제가 아니라 '바이든 대통령 일정 변경'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정 조정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사전에 분 단위로 일정이 정해지는 '정상외교의 장'에서, 특히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일 정상과 만나는 일정이 모두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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