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대통령도 겪은 '외교참사' 공세…한 총리 "외교 문제에 여야 따로 없어"
야권은 윤석열 대통령이 국장 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록 작성을 하지 못한 데 대해 '외교 참사'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19일(현지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지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고 있다. /런던=뉴시스 |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정치권이 윤석열 대통령의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조문을 두고 또 '외교 홀대' 공방에 빠졌다. 더불어민주당은 "한국이 '글로벌 호구인가'"라며 맹비난했고, 정부·여당은 현지 사정에 따른 일정 조율일 뿐 홀대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대통령 순방 때마다 '홀대론' 논란이 반복되면서 외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민주당 등 야권은 20일 해외 순방 중인 윤 대통령의 '외교무능론'을 외치며 맹폭했다. 앞서 윤 대통령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직후 참배와 조문록을 작성할 것으로 계획했지만, 교통 통제 등의 이유로 못하게 된 점을 꼬집은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주요 정상은 국장 전 참배를 마쳐 윤 대통령과 대조됐다.
김성환 정책위의장은 원내대책회의에서 "'조문 외교'를 하겠다며 영국에 간 윤석열 대통령이 교통 통제를 이유로 결국 여왕의 조문은 못 하고 장례식장에만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일대 교통통제는 사전 예고되어 있었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운동화 신고 걸어서 조문을 했다. '교통 통제'를 몰랐다면 무능이고, 알았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면 더 큰 외교 실패, 외교 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민들은 이제라도 한국 대통령이 국익 관점에서 당당한 외교를 해서, '한국이 글로벌 호구'가 아님을 증명해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다.
임오경 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국민들이 정상 외교에 나선 대통령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지켜봐야 하나"라며 "윤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자세로 순방에 임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탁현민 전 비서관은 이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조문은 일종의 패키지인데 윤 대통령은 육개장 먹고 발인 보고 왔다는 것"이라며 정부의 의전 실수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조문을 중심으로 둔 외교 일정이었기 때문에 한두 시간이라도 일찍 갔어야 했다"며 "기본적으로는 외교부와 의전비서관실의 실무적 책임이 있고, 그리고 현장에서 뭔가 그 상황을 타개할 만한 센스를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여당은 조문을 취소당했다는 야권의 주장은 "근거 없는 비판"이라고 반박했다. 현지 교통 사정 등의 이유로 국장 뒤에 조문록을 작성하기로 일정을 변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장례식 조문을 하기 위해 가 계신 대통령에 대해 이런저런 금도를 넘는 비판을 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며 "민주당도 불과 몇 달 전에는 집권당이었고 대통령의 외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외교 활동 중에라도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 선수에 대한 응원과 예의를 지켜줄 것을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실도 조문 취소가 아닌 영국 왕실의 요청에 따른 일정 순연이라고 반박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실 부대변인은 두 번째 순방지인 미국 뉴욕 도착 후 브리핑에서 "런던의 교통상황이 좋지 않아 국왕 주최 리셉션에 각국 정상들이 늦겠다는 우려로 영국 왕실이 조문을 순연하도록 요청한 것"이라며 "한 국가의 슬픔과 인류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더 큰 슬픔"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윤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한 후 인근의 처치하우스를 찾아 조문록을 작성했다. 국장 후 조문록을 작성한 정상급 인사로는 윤 대통령 외에 외에도 EU집행위원장과 파키스탄 총리, 모나코 국왕, 오스트리아 대통령, 이집트 총리, 리투아니아 대통령 등이 있었다고 이 부대변인은 전했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왕실에서 여러 국가와 협의하면서 일정 조율한 것"이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외교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외교 문제, 특히 대외적인 문제는 여야가 없다"며 "여야 간 충분히 한마음으로 해주면 그만큼 더 대한민국이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외교할 수 있다"고 정쟁화 자제를 호소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당시 야권인 국민의힘으로부터 '외교 홀대론' 공세를 받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17년 12월 14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베이징 조어대 인근의 한 현지식당에서 유탸오와 더우장(중국식 두유)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
윤석열 정부의 '외교 참사'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8월 '미국 서열 3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입국 당시 영접 의전하는 우리 측 인사가 없던 점을 들며 야권은 "아마추어 외교가 빚은 부끄러운 참사"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하원의장 영접은 국회 측 소관이었고, 늦은 시간을 감안한 미국 측의 요청으로 영접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외교 홀대' 논란은 해외 순방 때마다 꾸준히 제기됐다. 대표적인 예가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방중 당시 '혼밥(혼자 먹는 밥)' 논란이었다. 3박4일의 방중 기간 10차례 식사 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지도부와의 점심은 두 차례였다. 문 전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와 베이징 한 식당에서 아침 식사로 유탸오(油條·꽈배기 모양의 빵) 등을 먹는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당시 야권에선 "중국 한복판에서 국빈인 대통령이 찬밥 신세를 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청와대는 홀대론에 적극 반박했지만, 중국 측 경호원의 한국 취재진 폭행,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팔뚝 인사, 서열 2위 리커창 총리와의 오찬 무산 등이 겹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여야를 불문하고 국가 간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민감한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로 끌어와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외교를 정치적 소재로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이번의 경우 자꾸 홀대론을 이야기하면 영국 정부가 항의까진 아니더라도 (반박하는) 얘기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여야 모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