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자신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홍보하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국가인재 1차 MZ세대 전문가 영입 발표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 후보(왼쪽). /남윤호 기자 |
상반된 유연함·결단력 강조…유권자는 혼란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들기 전 이상하게도 치킨이며, 쪄놓은 고구마, 상큼한 귤이 머릿속에 맴돈다. '먹지 말자' 해놓고 어느새 냉장고 문 앞에 와 있다. 이럴 땐 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던진 이 말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의 다이어터들을 해방했다. 늦은 야식을 먹을 때면 밀려오는 죄책감을 덜어주는 마법 같은 유행어다.
최근 대선 정국에서도 무적의 슬로건이 눈에 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이재명은 합니다'가 그것이다. 이를 두고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을 만들었던 정철 '정철카피' 대표는 "최고의 슬로건"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현재 민주당 선대위에 합류해 이 후보의 '메시지 총괄'을 맡고 있다.
해당 슬로건은 동일한 제목으로 2017년 2월 발간된 이 후보 자전 에세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이 후보는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이다' 정치인 면모를 강조했다. 그는 선대위가 출범한 지난달 초·중순까지 자신의 장점인 결단력과 추진력을 내세우며 이 같은 행보를 이어갔다. 이 후보는 10월 말 "30만~50만 원 규모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추진하겠다"며 내년도 예산안에 6차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을 반영하겠다고 내뱉었다. 지난달 15일엔 자신의 대표 공약인 '기본소득'의 핵심 재원이 될 '국토보유세' 비판 여론에 대해 "토지보유 상위 10%에 못 들면서 손해볼까 봐 기본소득토지세를 반대하는 것은 악성언론과 부패정치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며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후보는 돌연 지난달 18일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주장을 철회했다. '내년도 예산안'에 한했다고는 하지만 여당 원내대표가 재난지원금을 반대하는 정부에 '국정조사'로 압박하고, 비판하는 야권에 대해선 '윤석열 후보의 소상공인 50조 원 보상과 맞붙어보자'며 자신감을 내보였던 것 치고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국토보유세도 지난달 29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반대한다면 안 하겠다"며 입장 변화를 시사했다. 보름도 안 돼 '국토보유세'에 대한 입장까지 바꾸면서 야권에선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반면 여당은 "이재명은 '유연'합니다"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이 후보와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시 이재명답다"며 "철학과 원칙은 분명하지만,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현실 여건에 맞게 유연하게 한다"고 했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이 후보의 입장 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지만 '실용주의자'라며 칭찬 일색이었다.
이 후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힌 이유로 '국민의 뜻'을 내밀었다. 그는 지난 1일 4명의 선대위 외부 인사 영입 발표 때 "제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라 결코 대의나 국민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일들이 많다"며 "내 확신이 반드시 100% 옳은 길도 아니고, 옳은 일이라고 해도 주인이 원치 않은 일을 강제하는 건 옳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는 설득할 수 있고 설득해서 공감이 되면 그때 하면 된다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정리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불과 이틀 전 '광주 대학생과의 대화'에서 "나는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 시작하면 끝을 본다"고 추진력을 자랑했다. 그는 또 기성 정치인에 대해 "진짜 말만 한다. 약속 안 지키는 것을 우습게 안다"고 꼬집으면서 "나는 이렇게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자고,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시작하면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행동방식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 후보는 최근 전 국민 재난지원금 내년도 예산안 반영과 국토보유세 주장에 대해 철회 입장을 밝히며 유연함을 강조하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코로나 대책을 위한 긴급회의에 참석한 이 후보(왼쪽). /남윤호 기자 |
정치인의 '자질'을 판단할 때 유연함은 결단력, 추진력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둘 다 포기하지 않을 때다. 이 후보는 2일 선대위 영입 인사 및 본부장단 인선 발표 때 자신의 대표 공약인 기본소득에 대해 "철회한 게 아니다"라면서도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보편적인 기본소득 문제는 재원마련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위원회 등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거쳐서 국민이 동의할 때 실제 정책으로 집행하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국민이 반대하면 실행하지 않겠다는 의미지만, 끝내 국민을 설득해 집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가 현재 공약으로 내놓는 정책들을 집권 후에 실행할지 안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알쏭달쏭하다. 이런 상황에 '이재명은 합니다' 슬로건은 마치 맛있는 야식을 먹고서 살이 찌지 않기를 기대하며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주문으로 자기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신념보다 '국민의 뜻'을 우선할 경우 유권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후보의 유연한 행보는 긍정적이지만 '보편 복지'라는 자신의 정치신념까지 흔들린다면 '대한민국호'를 맡길 선장으로 믿고 의지하기 어렵다.
이 후보와 민주당은 현재 '이재명은 합니다' 슬로건으로 온·오프라인 곳곳에서 홍보하고 있다. 반면 그의 달라진 입장에 "이재명은 '안'합니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여론이 밈(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2차 창작물이나 패러디물) 형태로 공유되고 있다. 이제 '이재명은 합니다'를 내려놓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