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8일 전국민 재난지원금에 대한 의견을 사실상 철회했다.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정당쇄신, 정치개혁 의원모임'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는 이 후보. /남윤호 기자 |
20일 만에 입장 선회…野 "'무작정 지르고 보자' 식"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내년 예산에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반영해달라는 의견을 사실상 철회했다. 6차 재난지원금에 대해 '보편 지급'을 주장한 지 20일 만이다. 야당은 물론 정부와도 이견 조율이 되지 않아 대선 정국에서 불필요한 잡음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속한 결정을 두고 내부에선 "실용주의자"라고 평가했지만, 일각에선 '성급한 추진으로 혼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후보는 18일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고집하지 않겠다"며 "여야 합의가 가능한 것부터 즉시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재난지원금에 대한 강공 드라이브를 밀어붙이다 돌연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이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1차 재난지원금 지급 때부터 경기도지사 신분으로 '보편 지급'을 강하게 주장하며 당·정과 마찰을 빚어왔다. 지난달 29일 당 대선 후보가 된 이후에도 그는 6차 재난지원금을 두고 보편지급 방식을 주장했다. 이에 여당은 고심 끝에 지난 9일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진을 공식화하며 이 후보 지원사격에 나섰다. 하지만 재원 조달 방안을 두고 야당은 물론 재정당국과 맞붙었다. 민주당은 지난 7월 이후 초과세수가 19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세금 납부를 내년으로 유예해 재난지원금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지만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최근에는 당 지도부가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반대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기획재정부를 향해 '국정조사' '기획재정부 해체'까지 언급할 정도로 당정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후보와 당은 지난 16일까지만 하더라도 반드시 전 국민 재난지원금 등 '이재명표 예산'을 관철하겠다고 밝혀왔다.
입장을 바꾼 배경에 대해 이 후보는 '신속한 지원'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그는 "야당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에 반대하고 있다. 정부도 신규 비목 설치 등 예산 구조상 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며 "우리가 각자의 주장으로 다툴 여유가 없다"고 했다.
박완주 정책위의장은 이 후보의 결정에 대해 "실용적"이라며 추켜세웠다.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하는 박 위의장(가운데). /남윤호 기자 |
내부적으로는 당에서 재원을 검토 과정 중 판단 착오가 파악,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박완주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당에서는 초과 세수 중에 이연, 납부 유예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하면서 납부 유예한 재원으로는 일상회복 지원금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당은 8~10조 원 정도 세금 납부 유예분 확보를 예상했지만, 국세청 등 기관을 통해 확인한 결과, 올해 초과세수라 내년으로 이연시킬 수 없다는 점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이 후보에 보고했고, 곧바로 입장문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하다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당 안팎 우려도 정무적 판단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5선 중진 이상민 의원은 지난 17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정이 서로 갈등이 깊어지고 국정조사 운운하는걸 보면 국민들은 불안해할 것"이라며 "임기 말 정부이니까 여당이 겁박하고 끌고 가겠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쓴소리한 바 있다.
무리하게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장했다가 20일 만에 철회한 이 후보의 결정을 여당은 오히려 '실용적'이라고 추켜세웠다.
박 위의장은 "보는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후보가)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면모를 보면서 생각보다 굉장히 유연하고 실용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현장에서 경험한 게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선대위 정책본부에 속한 한 의원도 <더팩트>와 통화에서 "후보는 굉장히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시장도 하고 행정을 쭉 해온 과정을 보면 자기 주장만 가지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후보가 입장을 굽히면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여야 협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18일 오전 SBS D 포럼 '5천만의 소리, 지휘자를 찾습니다'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SBS 프리즘타워로 들어가는 윤 후보. /국회사진취재단 |
반면 조율되지 않은 채 의사결정을 내린 뒤 여론 눈치를 보고 이를 뒤집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허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이미 이재명 후보의 고집에서 비롯된 소모적 논쟁으로 국민들은 혼란을 겪었고, 민주당과 기재부는 낯 뜨거운 싸움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깊은 고민도 없이 '무작정 지르고 보자'는 이 후보를 바라보며 국민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제 와 궁지에 몰리자 여야가 머리를 맞대 달라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 후보가 '전 국민 재난지원금' 주장을 꺾으면서 '이재명표 정책' 중 남아 있는 소상공인 손실보상 확대와 지역화폐 예산 증액과 관련해선 민주당이 야당에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손실보상 의제에 대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50조 원 내년도 지원을 말한 바 있으니 국민의힘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정조준했다.
올해 무산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은 대선 이후 추경을 통해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 위의장은 "민주당은 내년 대선 후 추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내년에 추경 규모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