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경남지사가 '댓글 여론 조작'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지사직을 상실했다. 지난 21일 징역형을 확정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대해 입장 밝히는 김 지사. /뉴시스 |
동지의 아픔보다 지자체장 공백사태 먼저 살펴야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올림픽. 이름만 들어도 결승전에 나서는 선수마냥 가슴이 뛴다. 4년간 준비한 게 때론 1초 만에 허무하게 승부가 나니 보는 사람도 경기에 눈을 뗄 수 없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은 인생 최대의 이벤트였다. 88 서울올림픽은 구경도 못 해본 데다 다양한 이슈까지 양념으로 얹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동계 스포츠 스타 김연아 선수를 보유하고 있겠다, 북한에서 선수 파견은 물론 김정은 국무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을 '특사'로 내려보내기까지 했으니 2018년 당시 전국은 확실히 들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잡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스하키팀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두고 공정성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이에 대해 방송인 김어준 씨는 그해 1월 한 방송에서 매크로(여러 댓글을 한꺼번에 자동으로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를 소개하며 남북 단일팀 구성 관련 기사 등에 달린 문재인 정부 비판 댓글에 대해 "'매크로 조작'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누리꾼들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네이버 수사 촉구 글을 올렸고, 당 대표였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자체 수집한 네이버 댓글 조작 정황 증거를 경찰에 제출하면서 수사를 의뢰했다. 댓글 사건의 배후에 보수 진영이 있다고 믿었지만 댓글 조작을 지시했던 이들은 '드루킹' 김동원 씨와 민주당 당원들인 것으로 나타났고,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연루 의혹이 나오면서 특검 수사까지 이어졌다.
자신의 '연루설' 보도 2시간 만에 김 전 지사는 기자회견을 갖고 "메시지는 드루킹이 일방적으로 보냈고 확인을 못 했다"며 "본질은 대선 후 무리한 대가를 요구해 거부당하자 매크로를 통해 악의적으로 정부를 비난한 사건"이라고 해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법원 판결 이후 김 전 지사의 '결백'을 주장하며 사법부 불신을 드러냈다. 지난 2019년 2월 19일 김 지사 판결문 분석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주민(오른쪽) 민주당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특별위원장과 이재정 대변인. /국회사진취재단 |
2019년 1월 1심 판결에서 김 전 지사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자 여권은 '김경수 구하기'에 나섰다. 당시 민주당 '사법농단 세력 및 적폐청산대책 특별위원회'는 1심 판결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드루킹 일당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김 전 지사가 범행 계획을 인지한 것만으로는 여권에 유리하게 조작하도록 지시한 혐의(업무 방해)의 유죄 판결은 법리상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2년 6개월이 흘러 대법원은 김 전 지사가 1년 6개월간 100여 건 이상 기사 목록을 전송하고 기사 댓글에 '공감'을 누른 점, 소셜 미디어의 '비밀 대화방'을 통해 드루킹으로부터 온라인 정보보고를 49차례 받은 점, 김 전 지사가 기사 URL을 전달한 점,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고 드루킹 일당 요구에 오사카 총영사직 인사 추천을 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판결 내렸다. 여권이 주장하는 대로 '선하고 순수한' 김 전 지사가 드루킹 일당에게 이용당했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의 반응이다. 민주당 인사들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대권주자인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드루킹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유죄를 판단한 것은 증거 우선주의 법 원칙의 위배"라고 했고, 김종민 민주당 의원도 "우리의 사법 시스템이 온전히 진실을 향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법개혁을 추진해온 만큼 이런 발언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청와대 대변인 출신 고민정 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슬퍼하려니 패자가 된 것 같아 이 역시 그러고 싶지 않다"며 김 지사가 판결 직후 한 발언인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자리로 돌아와'를 해시태그로 남겼다. 이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공인인 국회의원이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도 되느냐. 이렇게 범죄자를 두둔해도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고 의원은 "조 의원님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저에겐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지켜야 할 사람은 집권여당과 김 전 지사를 믿고 재판받는 와중에도 그를 찍었다가 도정 공백이라는 배신감에 허탈해할 유권자들이다. 김 전 지사는 지방선거 준비 도중 '드루킹 사건'이 터졌지만 출마를 감행했다. 경남도는 오는 10월에 보궐선거를 할지, 선거비용 등을 고려해 권한대행체제로 운영할지 혼란한 상황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도지사 보궐선거가 결정되면 오는 10월 6일 실시할 수 있다. 하지만 특례규정에 따라 선거일로부터 임기만료일까지 1년 미만이면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 전 지사 임기 만료일은 내년 6월 30일까지로, 보궐선거일로부터 1년이 되지 않아 보궐선거를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 경남도선거관리위원회는 오는 27일 도지사 보궐선거 실시 여부를 결정한다. 보궐선거에 투입되는 비용, 코로나19 방역대책 등을 모두 고려할 예정이다.
26일 재수감 되는 김 전 지사 대신 고민은 남은 도민들이 떠안게 됐다. 이처럼 여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야권의 '문재인 정부 정통성 훼손' 주장을 의식한 것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 '복심'으로 불리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야권에서 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 데 대해 "대꾸할 가치가 없다"며 당시 문 후보가 홍준표 후보에게 17%포인트라는 압도적 차이로 승리했다고 반박했다. 조작된 댓글 여론이 당시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문 정부 정통성에는 문제없다는 주장이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와 대적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댓글 조작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금메달 딸 유력 후보면 도핑해도 상관없나"라고 반문했다. 지난 2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는 안 대표. /이선화 기자 |
이에 대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어차피 금메달을 딸 유력 후보면 도핑해도 상관없나"라며 거칠게 반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확실히 보수 진영의 승리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해 4월 중순 당시 안철수 후보도 30%대까지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 후보에게 'MB아바타' '안초딩' 등의 부정 여론이 형성됐고, 참다못한 안 후보가 4월 23일 대선 TV토론에서 "제가 MB 아바타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를 계기로 공교롭게도 지지율은 급락했다. 국민의당 측에서는 이때 양강 구도가 흔들리며 비문(非文) 표심이 분산됐다고 주장한다. 승패가 뒤바뀌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이때를 계기로 안 대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건 공감이 된다. 이런데도 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아쉽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이명박 정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지만 박근혜 대통령도 사과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정의당은 드루킹 사건으로 고 노회찬 전 의원을 잃었다. 21일 청년정의당 채용비리신고센터 '킬비리' 설립 기자회견에서 채용비리 척결을 의미하는 집행검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류 의원. /이선화 기자 |
어디 이뿐이랴. 드루킹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 노회찬 전 의원은 극단 선택을 했다. 이로 인해 사실상 투톱 체제였던 정의당은 한쪽 바퀴를 잃었다. 심상정 전 대표가 세대교체 하겠다며 물러난 이후 정의당은 세간의 관심에서 더 멀어진 것 같다.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이 사건이 없었다면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소수당은 쇼라도 할 수밖에 없다"며 채용비리 관련 당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영화 '킬 빌' 코스프레를 안 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여권 지지자들조차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김어준이 어시스트하고 추미애가 골로 연결시킨 사건" "추미애 작사, 김어준 작곡"이라며 팀킬을 한탄하고 있다. 올림픽 경기에선 팀킬은 패배로 직결된다. 상대방의 꾀임에 그대로 넘어가는 '선한 선수'는 더더욱 원치 않는다. 무능할 뿐이다. 반성 없는 집권당의 적반하장은 국민을 무시하는 최악의 태도다.
코로나19로 연기됐던 '2020 도쿄올림픽'이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었다. 우리 선수들은 '정치권의 팀킬'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고 선전하길 바란다. 무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승전보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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