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의 눈] "날아라 여성" 외치던 남인순의 추락을 보며
입력: 2021.01.07 05:00 / 수정: 2021.01.07 05:00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가해자 측에 이를 전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3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는 남 의원. /배정한 기자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가해자 측에 이를 전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3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는 남 의원. /배정한 기자

'페미니스트 정치인'에서 '2차 가해 당사자'로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네 자매 중 셋째 딸. 유년시절 '아들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혼잣말을 듣고 내심 기분이 상한 적이 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선 제도로 남녀를 차별한다는 뼈아픈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던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도 멋져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남윤인순' 여성운동가였다.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2004년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피해자 '2차 가해'로 이어지는 경찰 수사관행과 언론의 보도 행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에 대해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피해자를 모독하는 발언, 가해자 가족의 피해자에 대한 협박 등 인권침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언론에 의해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기도 했다. 수사기관과 언론에 의해 피해자의 인권이 또다시 침해당하는 2차 피해가 일어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겨지는 준칙이지만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도 어색했던 당시엔 여성인권운동가이기에 할 수 있는 따끔한 충고였다. 그는 19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2010년 상임대표 임기를 마칠 때까지 20년간 여성운동 현장에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영유아보육법 개정, 모성보호관련법 개정, 여성할당제 도입, 호주제 폐지, 성매매방지법 제정 등을 이끌었다.

이랬던 그는 당시 민주진보진영의 야권통합기구인 '혁신과통합'에 시민사회 대표로 참여해 고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거쳐 2012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다. 여성인권운동가 '남윤인순(호주제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부모 성을 따 만든 것)'에서 정치인 '남인순'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그는 저서 '날아라 여성'에서 정치계에 발을 들인 이유로 "이제 차별받고 상처받은 여성들은 치유의 에너지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제도권 정치에 들어온 '남인순'의 활약은 눈에 띄었다. 2012년 4월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김형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의 사퇴를 촉구했고, 이듬해에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사진을 본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이나 주미 대사관 여성 인턴을 성추행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을 따끔하게 질타했다. 날카로운 일침은 자기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8년 3월 차기 유력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폭로가 터진 후 남 의원은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사실을 접하고 같은 당 의원으로서 참담함을 넘어서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그는 안 전 지사의 '어리석은 행동에 용서를 구한다'는 입장문에 대해서도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검찰 수사가 의뢰되면 수사를 받겠다든지 (해야지) 아직은 용서를 구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었다.

여성인권을 위한 입법활동도 활발했다. 19대 때부터 21대 현재까지 대표발의한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만 14건이다. 이 가운데 성폭력 피해자의 보호와 지원뿐만 아니라 '피해자 인권'을 지켜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법안도 있다.

6일 국회 소통관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에게 성추행 관련 의혹을 전달한 남 의원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국민의힘 여성의원들. /남윤호 기자
6일 국회 소통관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에게 성추행 관련 의혹을 전달한 남 의원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국민의힘 여성의원들. /남윤호 기자

하지만 '성추행 피해자 인권 증진'에 대한 신념은 오랜 인연 앞에서 꺾였다. 그는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 후 18일 만에 "통절히 반성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말했던 "너무나 참담한 마음과 자책감이 엉킨 어려움"을 이해하며 남 의원에 대한 비판을 거뒀다.

5개월 후 지난달 검찰의 발표로 그가 자신의 보좌진 출신인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전화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남 의원은 "피소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유출한 바 없다"면서도 "'박 시장 관련 불미스러운 얘기가 도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라며 통화 사실은 인정했다. 성추행 피해자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폭로한 사실을 한국여성단체연합을 통해 전해 듣고 가해자 측근에 이를 알린 것이다. 이런 일들이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부적절한 행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실수'가 아닌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 전 시장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는 이에 대해 "'음주 후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닙니다' 이런 뜻인가"라고 비꼬았다.

6일 정치권 안팎에선 남 의원 사퇴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여성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계 대모를 자처하던 남 의원의 추잡한 민낯이 드러났다"며 "권력형 성범죄의 공범인 남 의원은 즉각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남 의원이 걱정했던 것은 성추행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며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바른인권여성연합이 한국여성단체연합 해체와 남 의원 의원직 사퇴를 촉구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도 성명서에서 "피해자는 사력을 다해 유사한 피해를 받아온 여성들의 편에서 선 변호인과 여성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위해 첫발을 떼었지만, 국가 시스템의 문턱을 넘기도 전에 소위 '박원순 사람들' 즉, 인맥이라는 밧줄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며 의원직에서 물러나라고 비판했다.

남 의원은 정치권에 들어와 여성인권 현장에서 몸소 겪은 고달픔과 애로사항을 알고 미세한 부분을 고쳐나갔다. 그의 이름 앞에 '페미니스트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그런 그가 '2차 가해 당사자' 꼬리표를 달고 추락했다. 쌓아올렸던 성과들이 우수수 무너졌다. 남 의원은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 사건 후 처음으로 사과하면서 당 대표 몫 최고위원 2명 여성 지명, 성폭력 가해자 공천 원천 배제, 국회의원 보좌진 남녀 직급별로 골고루 채용 등을 요청했다. "웬만한 대책으로는 민주당에 다시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면서다.

그가 가해자 측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 불신은 더 깊어졌다. 남 의원과 민주당은 이번 사태에 대한 더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진정한 성 평등 정치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unon8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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