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열의 정진기(政診器)] 민주당의 위험한 독주와 리스크
입력: 2020.06.21 00:00 / 수정: 2020.06.21 00:00
21대 국회 원 구성을 둘러싸고 절대과반을 앞세워 관례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여당과 이에 반발하는 미래통합당의 대치는 힘을 가진 자의 양보와 힘이 없는 자의 굴종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남윤호 기자
21대 국회 원 구성을 둘러싸고 절대과반을 앞세워 관례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여당과 이에 반발하는 미래통합당의 대치는 힘을 가진 자의 '양보'와 힘이 없는 자의 '굴종'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남윤호 기자

건강한 민주주의 위해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도 지켜야

[더팩트ㅣ국회=허주열 기자] 21대 국회 원 구성 과정에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진원지로 한 여야 대립은 지난 15일 박병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이 법사위를 포함한 6개 상임위원장 선출을 강행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즉각 여당의 6개 상임위원장 선출과 소속 의원의 해당 상임위 강제배정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히고 국회를 떠나 지방의 사찰에 머물며 칩거에 들어갔다.

협상 파트너가 부재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계획대로 19일 본회의를 열고 단독으로 나머지 상임위 구성을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박 의장이 "좀 더 협상하라"며 본회의를 연기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민주당은 야당과 협상을 재개해 늦어도 26일까지는 원 구성을 마치겠다는 방침이다. 김태년 원내대표가 주 원내대표를 찾아가 만나겠다는 입장도 밝혔지만, 민주당이 이미 선출한 법사위원장직을 되돌리지 않으면 통합당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어서 파행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권을 바탕으로 사실상 국회의 상원 역할을 하는 법사위는 2004년 17대 국회부터 야당에서 위원장을 맡아왔다.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국회의장=여당 몫', '법사위원장=야당 몫'은 16년을 이어오면서 일종의 '관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76석의 과반을 훌쩍 넘는 민주당은 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는 것은 잘못된 관례여서, 이제부터는 여당이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숫자의 힘으로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 이전처럼 18대 상임위를 전부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21대 국회 원 구성 협상은 관례, 상대 당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채 진행되고 있다. 지난 11일 국회의장실에서 원 구성 협상을 위해 (왼쪽부터) 만난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 박병석 국회의장,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 /남윤호 기자
21대 국회 원 구성 협상은 관례, 상대 당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채 진행되고 있다. 지난 11일 국회의장실에서 원 구성 협상을 위해 (왼쪽부터) 만난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 박병석 국회의장,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 /남윤호 기자

관례는 전부터 해 내려오던 전례가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지켜온 질서'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16년간 지켜온 관례는 충분히 존중받을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18대 국회에서 81석을 차지한 야당임에도 관례에 따라 법사위원장을 맡았던 민주당이 21대 국회에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이제부터는 여당이 법사위원장을 맡겠다고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관례에 정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최소한 '예고'는 했어야 했다. 쟁점이 있는 법률을 제정·개정할 때는 공청회 등을 통한 의견 청취와 상임위에서 치열한 여야 협의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는 해당 법안의 적용 시기에 대한 내용도 포함된다.

변화를 야기하기 전 언제부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국회에서 이어온 관례를, 그 관례의 혜택까지 본 세력이 상황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 도의에도 맞지 않다.

나아가 민주당은 '따를 테면 따르고, 싫으면 말라는 식'의 압박 전략에, 민주화 이전인 12대 국회 이전처럼 18개 상임위 전체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이에 통합당 내부에는 여당이 말로만 그러지 말고 18개 상임위를 다 갖고 알아서 국회를 운영한 뒤 그에 따른 책임도 지면된다는 강경론이 우세하다. 대신 통합당은 북한 사태 등 현안은 당내 특위 등을 가동해 자체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통합당 재선 의원은 "관례가 잘못돼 바꿔야 한다면,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다음부터 이렇게 하자고 하면 우리가 납득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본인들도 혜택을 받은 관례를 갑자기 거대 여당이 됐다고 바꾸겠다는 것은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민주당이 단독으로 선출한 법사위원장을 다시 내려놓고 통합당이 그 자리를 가져도 176석을 가진 민주당은 준연동형비례제 선거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해 처리했던 것처럼 모든 법안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도 관례를 어기고 법사위를 가져간 것은 패스트트랙 법안의 법사위 심의기간(90일)을 통합당이 악용할 가능성을 우려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절대과반이라 부르는 압도적 의석을 앞세워 야당을 무시하고 모든 입법을 속도전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지난 15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선 통합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법사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 선출이 단행됐다. /남윤호 기자
지난 15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선 통합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법사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 선출이 단행됐다. /남윤호 기자

민주당이 야당을 무시하고 국회를 뜻대로 좌지우지하면 대한민국은, 국민의 삶은 지금보다 나아질까. 최근 북한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 군사적 도발에 대처하는 민주당과 정부의 자세를 보면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포(砲)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민주당 소속 송영길 외교통일위원장)

"미국이 반대하더라도 바로 개성공단 문을 열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해야 한다…(중략) 이 기회에 평양과 서울에 남북 대사관 역할을 할 연락사무소 2개를 두는 협상을 시작하자."(김두관 민주당 의원)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 동의 문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해 이를 고려해 종합적으로 검토해 추진하도록 하겠다."(통일부 당국자)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이어진 대북 유화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게 이번 북한 사태로 증명됐지만, 당정은 여전히 해바라기처럼 북한을 바라보는 모양새다. 야당이 대북정책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소리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닿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는 절대 선이 아니다.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규범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작용과 이해',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세' 두 가지다. 지금 민주당은 상대 정당을 경쟁자로 인정하고 있는가, 다수당으로서의 권리 행사에 신중함을 잃지는 않았는가 묻고 싶다.

sense83@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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