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일부터 대남 공세를 지속하고 있는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제공 |
靑 "몰상식" vs 北 "역스럽다" 강대강 대치 불가피…대북특사 카드 날아가
[더팩트ㅣ청와대=신진환 기자] 청와대가 대대적인 대남 공세를 펼치는 북한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발신하며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거센 대남 비방에도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가급적 반응을 자제했던 것과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수위를 높이다 못해 막장으로 치닫는 북한의 행보와 관련해 청와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 강경 모드에 경색 국면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단계적 대남 압박 수단을 거론했던 북한이 차츰 실행에 옮기면서 군사 도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도 강력 대응 방침을 천명하면서 한반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3년간 공들였던 남북 협력 및 한반도 평화 구상도 차질이 불가피해진 가운데 남북관계를 진전시킬만한 카드가 없다는 점은 고민되는 부분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17일 "맹물 먹고 속이 얹힌 소리 같은 철면피하고 뻔뻔스러운 내용만 구구하게 늘어놓았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6·15선언 20주년 연설을 비난했다. 사진은 2018년 2월 청와대에서 김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한 후 악수하는 모습. /청와대 제공 |
◆ '이젠 할 말 한다'…김여정 담화에 발끈한 靑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7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연설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데 대해 "매우 무례한 어조로 폄훼한 것은 몰상식한 행위"라고 직격하면서 "북측의 이러한 사리 분별 못 하는 언행을 우리로서는 더 이상 감내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비판의 수위가 가장 높을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윤 수석은 "앞으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기 바란다"라며 날 것 그대로의 격한 표현을 쓰며 남한을 자극하는 북한에 일침을 가했다. 북한은 탈북민단체 대북전단 살포에 반발하며 한국 정부를 향해 '저능아' '멍청이' 등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청와대는 반응을 자제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야당을 중심으로 청와대가 너무 북한의 눈치를 보며 저자세를 보인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전날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이후 청와대는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며 대북 강경 기조로 급선회했다. 김 부부장의 담화에 청와대가 발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거듭된 대남 비방과 일방적 행동에 청와대의 불만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지난 11일 북한이 문제 삼았던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철저히 단속할 방침을 밝혔음에도 북한은 계속 폭주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7일 기자들과 만나 대북 강경 메시지 배경과 관련해 "상식적으로 판단하시다시피 연락사무소 폭파를 포함해 6·15 공동선언 기념사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라며 "한 부분만 볼 수는 없고 종합적으로 다 포함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대북특사 제안에 북한이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남북관계를 개선할만한 해법이 마땅치 않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평양 옥류관에서 오찬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평양공동취재단 |
◆ 남북 '강경모드'…文 평화 구상 멀어져
청와대가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면서 당분간 남북관계는 강 대 강 대치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남북 간 경색 국면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의 일방적인 강경드라이브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충성심 경쟁으로 인해 당분간은 한국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든 남북관계 악화는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남북 군사 합의에 따라 철수했던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GP)에 군부대를 재주둔하고 서해상 부근에 포병부대 배치와 포사격 등 접경 지역 부근에서의 군사훈련을 재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실제 북한이 군사 도발을 감행한다면 9·19 남북군사합의를 사실상 파기한다는 의미가 있다. 남북은 지난 2018년 9월 접경지역 군사행동을 금지하고 각종 군사 연습을 중지한다는 내용 등을 합의문에 담았다.
이미 북한은 일방적으로 연락사무소를 폭파,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을 사실상 파기했다고 볼 수 있다. 연락사무소는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 선언에 따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관계가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회귀한 것이다. 또한 북한은 미사일 발사 등 무력 도발을 일삼았던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도가 깔린 게 아이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처럼 최근 일련의 북한 행보를 보면,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2017년 취임 이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의 기대감이 어느 정부보다 커졌지만,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문 대통령의 노력도 빛이 바래고 있다. 게다가 문 대통령의 독자적인 남북 협력 사업 제안에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해 보인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카드도 없다는 게 문제다. 정부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북특사 파견을 비공개로 제의했으나, 북한은 이 내용을 공개하며 거절했다. 북한을 달랠 방법으로 거론됐던 대북특사 카드는 날아가 버린 셈이다. 북한은 한국 정부와 대화할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의 4차 남북 정상회담에도 반응이 없는 북한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북한의 대남 비방 등 행보와 관련해 "(북한은 제재 완화 등에 있어서) 사실상 한국 정부의 필요성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부로서는 남북관계를 개선할 만한) 별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