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의 눈] 이용수 할머니의 외침 파장, 왜 손가락만 보나
입력: 2020.05.11 00:00 / 수정: 2020.05.11 00:00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해결에 앞장서온 정의기억연대와 관련해 기부금 등 사용처 불명,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 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 파문을 낳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 /이동률 기자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해결에 앞장서온 정의기억연대와 관련해 기부금 등 사용처 불명,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 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 파문을 낳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 /이동률 기자

文정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되돌아봐야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대학생 시절 서울 종로구 옛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두 번 참가한 적이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10월 그날 집회엔 소년 소녀티를 벗은 고등학생들이 힘 있는 목소리로 일본 정부의 진심 담은 사과를 촉구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김복동 할머니도 계셨다. 할머니는 학생들의 외침을 흐뭇하게 지켜보신 뒤 포근하게 안아주셨다.

당시엔 젊은이들의 꾸준한 관심과, 증언해줄 할머니들만 생존해 있다면 '일본 정부도 조만간 무릎을 꿇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언론계에 발을 들인 후 이런저런 뒷얘기를 귀동냥으로 많이 주워들었다. 그 중 '수요 집회'를 주최하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관한 얘기를 듣고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 국민의 기부금이 온전히 할머니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당시엔 '설마'하고 넘겼다.

그래서 지난 7일 이용수(92) 할머니의 외침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 이용수 할머니는 "자기들과 함께하는 할머니는 피해자라며 챙기지만, 단체에 없으면 피해 할머니라도 신경 안 쓰는 걸 봤다"면서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성토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정의연이 받는 지원금, 기부금 사용처가 불투명하다고 주장하며 28년간 참석해온 수요집회에 더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특히 정의연 이사장 출신인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에 대해 "자기 사욕 차리려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안 하고 애먼 데 가서 해결하겠다고 한다"며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함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일본군 위안군 피해 당사자로부터 나온, 어찌보면 첫 내부 고발에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윤 당선인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8일 페이스북에 입장문을 올려 정의연의 활동과 회계가 철저히 관리되고 있고, 모금 목적에 맞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할머니들께 드린 지원금이나 기부금도 할머니들의 지장을 찍어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합의로 10억 엔을 받기로 한 사실을 윤 당선인만 알고 있었다는 할머니 주장에 대해선 "오늘(7일) 오전에 이용수 할머니와 통화를 하며,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다"라고 했다. 우희종 더불어시민당 대표도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 할머니 주변에 계신 최모 씨라는 분에 의해 (이용수 할머니)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고 했다.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자 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19년 8월 14일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 140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모습. /이동률 기자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자 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19년 8월 14일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 140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모습. /이동률 기자

할머니의 폭로는 '위안부 지원단체' 의혹을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 두 달 전까지 외교부 차관을 지냈던 조태용 미래한국당 당선인은 할머니의 주장대로 윤 당선인이 외교부 담당자로부터 위안부 합의 진행 상황을 사전에 보고 받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시민당은 10일 제윤경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전날 밤 보고는) 불가역적 해결,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 자제, 소녀상 철거 등의 내용은 뺀 상태였다"라고 반박했다.

협상 내용 일부를 숨긴 일방적 통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 당선인에게 "사실과 다른 의혹제기로 윤 당선인에 대한 가짜뉴스 유포에 가담한 데 대해 당장 사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할머니 폭로의 배후로 지목된 최용상 가자 평화인권당 대표에 대해선 "이번 더불어시민당 비례공천에 탈락한 것을 수긍하지 못하고 시민당에 대해 계속해서 불만을 표한 바 있다"며 "가짜뉴스 유포와 함께 여러 의혹제기를 한국당과 사전에 기획, 공모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반격했다. 최 대표는 "터무니 없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의 과잉 해석 사이에서 정작 당사자인 할머니의 본질적 외침에 대한 응답은 보이지 않는다. 정의연은 지원금, 기부금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주장에 대해 피해 할머니들에게 1992년 생활지원금으로 100만 원, 2017년 1억 원의 성금을 전달했다는 영수증을 공개했다. 정의연이 국세청 홈택스에 공시한 2016∼2019년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활용실적 명세서'에 따르면 최근 4년간 49억1606만 원을 기부금 수입으로 모금했고, 이 가운데 9억2014만 원(약 18.7%)이 피해자 현금 지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의연은 나머지는 수요집회와 위안부 피해 인식제고, 홍보사업 등에 쓰고 있다며 투명한 회계처리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지원금, 기부금의 용처를 밝히면 끝이라고 주장한 게 아니다. 이제는 '문제 해결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제안하신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한 돈과 시간을 쓰지만 집회는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며 "이제부터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받은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친하게 지내면서 대화를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받아내야 하지만 이를 위해선 일방적인 집회보다 한일 교류 강화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기자회견 날 마스크 수백 장이 든 상자를 가져와 이를 일본에 기부하겠다고도 했다.

민주당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이라는 명분 하에 협상 상대인 일본의 입장 변화만 기다리기보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대로 한일 교류를 강화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주최로 열린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 사진 전시회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이해찬 대표. /뉴시스
민주당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이라는 명분 하에 협상 상대인 일본의 입장 변화만 기다리기보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대로 한일 교류를 강화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주최로 열린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 사진 전시회'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이해찬 대표. /뉴시스

할머니가 던진 '증오보단 화해'라는 화두는 지난 2007년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위안부 피해 상황을 증언했던 때와 달리 이제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으로 공론화된 만큼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다.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의 말씀을 민주당은 되새겨야 할 때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17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번복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만 3년이 된 현재까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36명(2017년 10월 기준)이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18명만 살아 계신다. 할머니들에게 언제까지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 강요할 건가. 그들도 누군가의 평범한 할머니이자 어머니이자 자기 자신이다.

피해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생기면 정치권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 피해자의 권익이라는 관점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지원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을 알리는 계기로 삼는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후자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생각한다면 피해자들의 총의를 모으는 일이 정말 불가능할까.

1991년 대학가에서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잇따랐을 때 시인 김지하는 기고글에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며 죽음의 과잉 정치화를 경계했다. 당시에는 시위 중 사망한 학생의 시신을 놓고 학생회와 유가족이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죽음을 기념할 권리를 유가족 대신 차지한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 대해 "정작 문제해결의 주체여야 할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민단체에서 주도하는 운동의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피해 할머니 지원에 30여 년의 세월을 바쳐온 윤 당선인 입장에선 억울할 듯하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부의 반일 투쟁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여전히 의문이 든다. 왜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나.

여당은 '일본 정부 입장이 강경하다'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를 방치하지 말고 냉각기에 있는 한일 관계를 풀면서 피해자들의 권익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민감한 사안인 만큼 정치적 해석은 최소화하고 시민사회의 상식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윤 당선인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21대 국회 의정활동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라는 <더팩트>의 질문에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 비롯해 여성인권 문제를 중심으로 노력하고 싶다"는 짧은 답장만을 보내왔다.

unon8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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