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부암동 골목 일대를 방문해 자신의 대학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이 전 총리가 17일 영화 기생충 촬영지인 서울 종로구 자하문터널 계단을 찾아 생각에 잠긴 모습. /현장풀 이새롬 기자 |
"예쁜 여학생이 살던 집…공부 열심히 안 해 청춘 망가진 곳" 농담
[더팩트ㅣ종로 부암동=박숙현 기자] "저 귀퉁이에 막걸리집이 있었죠. 제 청춘을 앗아간…한 병에 80원."
인왕산 자락이 함박눈에 하얗게 물든 17일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 앞 골목에서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서울 종로에 출마하는 이 전 총리는 이날 주민들의 요청으로 낙후지역 관광지 개발 현안을 살피기 위해 부암동을 찾았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상징하는 파란 외투에 파란 운동화 차림으로 무장했다. 그는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촬영지인 자하문터널 입구계단을 비롯해 무계원, 윤웅렬 별장, 현진건 집터 등 부암동 골목길 곳곳을 들여다보며 젊은시절 추억을 회상했다.
부암동 일대는 그가 서울대 재학 시절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설명하는 그의 어조에는 청년 시절 생기가 묻어났다.
이 전 총리는 자하문터널 계단에서 골목길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 제가 말씀드린 길을 올라가면 윤웅렬 별장이 나옵니다. 저기가 원래 개울이 있었던 곳인데...저기 사람들이 서 계신 곳 귀퉁이에 막걸리집이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영화) 볼 때 난 (여기가 그 계단인지) 몰랐어요"라며 "제가 여기 살 땐 이 터널이 없었다. 그러니 익숙지 않을 수밖에"라고 멋쩍어했다.
영화 '기생충'이 지난해 한국 영화 최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수상하자 서울시와 종로구에선 영화 촬영지를 관광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 전 총리도 이날 자하문 터널을 둘러보며 관광지 개발에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이 전 총리는 "넓게 보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한국문화예술의 수준에 대한 세계인들의 기대와 관심이 여기에서 반영된 것인데 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문화예술을 어떻게 융성하게 할 것인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숙제라 생각한다"며 "특히 종로는 전통문화예술과 대학로 중심으로 한 현대 대중문화예술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문화예술의 융성은 종로의 문제이자 대한민국의 문제라 생각한다. 저도 그 숙제를 이행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함박눈이 내린 17일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영화 '기생충' 촬영지 계단을 오르는 모습. /이새롬 기자 |
부암동 골목길 초입에 들어서자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저 뒤편에 굉장히 경사진 곳이 있고, 그 위에 근사한 빌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라며 부암 골목 역사 길잡이가 된 듯 기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또 동행한 정재호 종로구의원에게 "저 귀퉁이에 막걸리집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정 의원이 "막걸리를 좋아하셨냐"고 하자 "젊어서는 그 외의 술이 별로 없었죠. 100원으로 술담배하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답했다. 부암동 주민센터 앞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그때도 버스 정류장이 저기 있었어요"라고 하는 등 옛 추억을 떠올렸다.
골목을 들어서자 차곡차곡 쌓여진 돌담에 깔끔한 경관이 펼쳐졌다.
길을 따라가니 이 전 총리처럼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유명한 작가 현진건의 집터를 가리키는 표석이 나왔다. 이 전 총리는 "그 분의 대표작이 '빈처'라 항상 가난을 연상했었다. 그런데 요즘 보니까 빈처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짧은 말을 남겼다.
21대 총선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17일 부암동 골목 한 카페 관계자의 사인 요청을 받아 사인 중이다. /한건우 인턴기자 |
가파른 언덕을 계속 올라 윤웅렬 별장이 나오자 이 전 총리의 말이 방언 터지듯 쏟아졌다. 기다란 담장 너머 있는 고즈덕한 분위기의 별장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 선생의 부친 반계 윤웅렬의 별장이다.
그는 "제가 살던 방은 마주보는 곳이었는데 여기서 생활할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다"고 했다. 이어 "그때 제가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데 동아방송에서 밤 10시 15분엔가 하는 음악방송이 있었다. 그것만 들으면 그냥 굉장히 외로워지고 해서 100원 짜리 동전을 들고 막걸리를 (마셨다)"고 했다.
그는 농담조로 "그 방송을 했던 진행자가 제 동아일보 후배기자의 친정 어머니였다. 그래서 제가 그 후배기자에게 '당신 어머니 때문에 내 청춘이 망가졌다'고 했다. 그랬더니 후배기자의 어머님이 좋아하셨다"며 "여기서 공부 열심히 한 기억은 안 나고 공부 안 한 기억만 (있는)그게 한심할지 몰라도 낭만이었지. 그런 곳이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에 정 의원이 "서울대 나왔으면서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된다"고 하자 "이것도 망언에 해당하나"하며 웃어보였다.
이 전 총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머물던 시절 들어섰던 하얀 집을 가리켜 "굉장히 파격적이었지"라고 하거나, 또 다른 집을 두고는 "예쁜 여학생이 살던 집"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전 총리의 부암동 골목길 현장 투어에는 그의 지지자들도 힘을 실었다. 골목길에 위치한 한 카페 관계자는 "팬입니다"라며 지나가는 이 전 총리를 붙잡고 사인을 요청했다. 갑작스런 요청이었지만, 이 전 총리는 흔쾌히 카페에 들어가 사인에 응했다. 덕분에 따듯한 차를 마시며 잠시 꽁꽁 언 몸을 녹였다.
이 전 총리의 종로구 부암동 관광지 개발 현장 방문에는 열혈 지지자들도 함께 했다. 한 지지자는 계단 맞은편에 위치한 자신의 빌라 옥상에서 영화 '기생충' 계단씬을 찍었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박숙현 기자 |
눈발이 날리는 꽃샘 추위에도 이 전 총리를 응원하며 약 1시간의 투어를 동행한 부암 주민들도 있었다. 한 지지자는 벽화 요청이 나오고 있는 자하문터널 계단에 대해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갑자기 바꿔버리면 영화 분위기가 없어져버리잖아요. 변화시키면 좀 그렇지 않을까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