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열의 정진기(政診器)] '셀프 왕따' 자초한 한국당, 누구를 원망하랴
입력: 2019.12.13 05:00 / 수정: 2020.01.31 18:14
나를 밟고 가라 이틀째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왼쪽 다섯번째)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김재원 정책위의장(왼쪽 여섯번째)과 대화를 하고 있다. /국회=배정한 기자
'나를 밟고 가라' 이틀째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왼쪽 다섯번째)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김재원 정책위의장(왼쪽 여섯번째)과 대화를 하고 있다. /국회=배정한 기자

'투쟁 올인' 전략 실패…대화와 협상, 개혁의 길 가야

[더팩트ㅣ국회=허주열 기자]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헌법 제49조)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채택한 국가에서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최후의 수단'이다. 우리 헌법에도 다수결에 의한 의결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대화와 타협을 먼저 진행하는 게 기본이다. 그 과정에서 특정인, 단체가 끝까지 반대하면 결국 다수결로 선택해야 한다.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은 이 원칙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10일 '2020 예산안'이 통과됐지만, 제1야당 자유한국당과 제2야당 의원 다수가 속한 바른미래당 비당권파(변혁)는 소외됐다. '4+1협의체(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당권파·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에서 마련한 수정안이 '다수결의 힘'을 바탕으로 가결된 것이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된 후 제1·2야당을 배제한 예산안이 통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야가 내년도 나라 살림과 직결된 예산안에 타협하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당장 한국당과 변혁은 "날치기 의회 폭거"라고 반발했고, 민주당은 "안타깝지만, 한국당이 자초한 일로 문제가 없다"고 일축했다. 예산안 처리 다음 날부터 양측은 서로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쏟아내며 정쟁을 이어갔다.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운데)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배정한 기자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운데)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배정한 기자

대화와 타협이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 국회가 일하기 위해선 다수결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는 게 4+1 측의 입장이다. 사실 이번 예산안 처리는 예고된 일이다. 4+1을 주도하는 민주당은 당초 지난 9일 오후 본회의를 열고 예산안과 패스트트랙 법안(유치원 3법, 선거·사법제도 개혁안) 일괄 처리를 준비했다.

특히 예산안의 경우 법정 시한(12월 2일)을 이미 넘긴 만큼 정기국회 내에 처리한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다만 이날 오전 한국당에서 새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변수가 생겨 일정이 조금 밀렸을 뿐이다. 새롭게 한국당의 원내사령탑에 오른 심재철 원내대표는 즉각 협상에 나서 나름의 협상안을 마련했지만, 의원총회에서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

기존에 진행해온 4+1 논의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예산안을 논의하자는 한국당의 주장을 '시간 끌기'로 판단한 민주당의 인내심은 하루가 한계였다. 이미 예산안 법정 시한도 어겼고, 정기국회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기적 특수성도 감안한 제한된 시간 내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다수결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학습 효과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전임 나경원 전 한국당 원내대표와 국회 운영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합의→번복', '떼쓰기', '정부·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한 전면적 반대'에 때로는 맞불을 놓고, 또 때로는 끌려 다니며 올해 내내 '놀먹 국회(놀고먹는 국회)였다'는 비판을 받는 데 일조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터다.

문제는 예산안 처리가 다수결의 힘을 통한 해결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활용한 마지막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이 원하는 연동형 비례제로의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골자로 한 사법제도 개정을 원하는 이해관계는 곧바로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들을 또 다시 다수결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당은 4+1의 선거·사법제도 개정을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야당을 동료로 만들어 여당을 압박했다면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간 한국당은 국회 내 동료를 만드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왕따가 되는 길을 택했다. 덕분에 다른 야당들은 같은 처지의 큰 형님 격인 제1야당이 아닌 여당의 손을 잡았다.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배정한 기자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배정한 기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한국당과 변혁은 예산안에 이어 선거·사법제도 개정에서도 본인들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게 된다. 특히 게임의 룰인 선거법 개정이 두 야당이 배제된 채 이뤄지면 다음 선거에서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협상을 해보고 안 되면 13일부터 임시국회 본회의를 열고,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한다는 방침이다.

이제라도 한국당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두 세력이 각자의 정치적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여론전을 펼치고 있지만,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바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당보다 우세한 민주당 지지율과 40%대 중반대의 안정적인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지금 민심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특히 지금과 같은 한국당의 투쟁 일변도 행보는 내년 총선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30%대 안팎에서 굳어진 한국당 지지율은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중도로의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전통적 지지층 결집만 주력하는 행보만 이어가다가는 텃밭인 대구·경북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2등으로 의석을 대거 내주는 참패를 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까이는 패스트트랙 법안에 대한 대화와 협상 참여, 중장기적으론 뼈를 깎는 개혁을 통한 중도로의 확장이 한국당이 살길이다.

sense83@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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