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택의 고전시평] 위기의 한일관계, 서희의 협상력에서 해법을 찾자
입력: 2019.10.29 08:13 / 수정: 2019.10.29 08:13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24일 이낙연 총리와 아베 일본 총리 사이에 회담이 열렸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유리하게 풀기 위해서는 고려 성종 때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탈환한 서희의 협상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문제인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 장면./청와대 제공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24일 이낙연 총리와 아베 일본 총리 사이에 회담이 열렸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유리하게 풀기 위해서는 고려 성종 때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탈환한 서희의 협상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문제인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 장면./청와대 제공

[더팩트 | 임영택 고전시사평론가] 우리는 고려 성종 때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탈환한 서희를 탁월한 협상가로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서희는 '세 치 혀’ 만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하 상류의 남쪽 개원 시 일대와 요양 시 이북 일대에 강동 8주를 설치하는 쾌거를 이루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의 동북아시아 판도는 요동과 중원을 거란이 차지하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나서 대치하는 국면이었다. 고려와 송이 손잡는다면 중간에 끼인 거란은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거란이 배후에 있는 고려를 오직 무력만으로 압박할 수 없었던 상황을 서희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거란 침략 시 서희가 담판을 주도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항복이나 땅을 떼어주자는 입장이 아닌 주전론자였다.

처음부터 협상에만 매달리지 않고 상대를 만나서도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1차적으로 거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한몫했다. 거란의 기세를 꺾어놓은 상황에서 서희는 담판에 돌입하여 거란의 철군과 강동 8주 개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희는 처음부터 기가 죽어 협상과 화평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협상력을 극대화했다. 설령 협상 테이블에 앉아 상대와 무언가를 주고받을 심산이 있더라도 테이블 밖에서는 협상을 안 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느긋한 대응이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이쪽에서 가진 것을 상대가 중요시할 때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실제로 보유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허장성세를 발휘하여 상대가 오판하게 만드는 것도 협상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카드를 숨기고 가급적 상대의 카드는 모두 탐색하며 상대보다 늦게 협상을 입에 올리는 측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예전부터 이러한 벼랑끝 협상 전술을 잘 구사하는 국가가 북한이며 충분히 벤치마킹할 가치가 있다.

북한은 현재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며 압박하고 자신들이 수용할 만한 셈법을 요구하였으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인들 내심으로는 초조하지 않을 까닭이 없지만 끝까지 버티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미국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것이다.

외교적 협상에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끌어내려면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국정 운영철학 및 태도가 중요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고 현장에서 협상을 이끄는 사람들의 협상력과 애국심도 중요하다. 협상 주도자는 자신이 주도하는 협상에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협상에 임해야 한다.

또한 최고결정권자는 협상 주도 팀의 협상 결과에 따라 신상필벌을 하는 원칙을 견지해야 된다. 협상 결과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 말든 협상 주도 팀을 방치한다면 확실한 동기부여가 안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북한이 북미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자 협상 실무 책임자 김영철을 협상 라인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듯 남한도 협상 주도 팀에 협상 결과에 따라 책임을 묻거나 포상을 해야 한다.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24일 이낙연 총리와 아베 사이에 회담이 열렸지만 아베는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일본 기업에 징용 배상을 명령한 남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한일청구권협정’을 일방적으로 깬 조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한 번의 만남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만 일본은 버티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고 한다.

일본의 정치·경제 침략에 맞서고 있는 이때 언젠가는 협상으로 마무리되겠지만 우리가 먼저 초조해 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미 패한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판을 깨지 않는 선까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견디며 강공을 하고 국내가 일치단결해야 이후 협상 테이블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일본의 남한 수출규제에 대항한 우리의 불매운동과 여행 안 가기 등의 여파로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타격을 받고 있다.

언젠가는 협상을 통해 이 국면을 마무리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남한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서 이후에 또 다시 도발을 못하도록 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하며 막판까지 버텨서 일본이 먼저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는 상황을 조성해야 된다. 초조함이나 유약함이 아니라 기선을 제압하고 거란의 약점을 집중공략하며 협상력을 극대화하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8주를 개척했던 서희의 협상 과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

일본과의 담판 뿐 아니라 우리 앞에는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 협상도 남아있다. 미국은 터무니없는 방위비 분담액 인상을 주장하는데 협상 팀은 버틸 때까지 버티면서 다른 협상 사안과 주고받으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구사해야 된다. 최근에는 트럼프의 압박에 농가와 사전교감이나 대책도 없이 너무도 쉽게 WTO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아 농민의 극심한 피해만 발생하게 되었다. 무조건 버티자는 말이 아니라 내어줄 때 내어주더라고 ‘크게 요구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벼랑끝 전술’로 얻을 것은 확실히 챙기는 협상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크다.

상대의 요구에 쉽게 굴하지 않고 기선을 제압한 뒤 취약고리를 논리적으로 공략한 서희의 협상 자세를 견지하고 협상 주도 팀에 신상필벌의 원칙을 적용하여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협상에서 자존감과 국익을 지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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