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편에서 계속
지난 두 달가량 국회가 파행 운영됐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선거제도 개혁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이다. 여야 4당은 지난 4월 말 자유한국당의 반대에도 '준연동형 비례제' 도입과 지역구 축소(253석→225석)·비례대표 의석 확대(47석→75석)를 골자로 한 선거제 개혁안 도입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의석수 10% 축소(300석→270석)와 비례대표제 폐지를 주장했던 한국당은 국회 내 결사 저지시도가 실패하자, 장외로 나갔다.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거나, 폐지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이전 선행돼야 할 것이 있다. 비례대표제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은 취지에 맞게 잘 활동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더팩트>가 20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 47인의 활동을 전수조사 했다. 나아가 비례대표제 확대·축소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어봤다. <편집자 주>
보스 중심 전략 공천이 '문제', 취지 맞는 신뢰 회복 '과제'[더팩트ㅣ국회=허주열·문혜현 기자] 20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 대다수는 의정활동 성적표와 무관하게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 당선을 노리고 있다. <더팩트> 취재 결과 47명 중 24명이 이미 지역구를 정해 지역 기반을 다지고 있고, '불출마' 입장을 명확히 한 의원은 3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출마 여부 자체를 결정하지 못했거나, 답변을 거부했다.
지역구 출마를 결심한 비례대표 의원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답변을 한 이들 대부분은 "기회가 된다면 제가 나고 자란 지역을 위해 (의원으로) 더 일하고 싶다"고 했다. 정당들은 통상 한 명의 비례대표 의원에게 두 번 이상 비례대표 배지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인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선 지역구 도전이 필수다.
출마 여부가 미정인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됐다. 나가고는 싶은데 지역구를 정하지 못한 경우와 나가고 싶지 않지만 당이 비례대표로 뽑아준 만큼 어려운 지역에 가서 희생하라는 요청이 있으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경우다.

◆비례 대표 의원의 지역구 출마, 전문가들은 '회의적'
비례대표 의원들의 지역구 출마에 대해 전문가들은 부정적 시각이 강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비례대표 의원의 지역구 출마는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라며 "지역구로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임기를 1년 정도 남긴 시점에 지역구 도전에 나서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임기 초반부터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당에서) 데려온 이유가 있었을 텐데, 지역구 활동만 하는 건 맞지 않다"고 말했다.
나아가 현역 비례대표 의원들과 전문가들에게 현 비례대표제 자체에 대한 평가도 물었다. 답변은 엇갈렸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개인적으로 비례대표는 각 분야 전문성 위주로 뽑아 국회에 와서 최대한 전문성을 살려 국가나 당을 위해 기여를 해야 한다고 본다"며 "그런 의미에서 지역구에 얽매이기보다 (선출 취지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임이자 한국당 의원은 "나름대로 비례대표들이 각 분야 일을 해내고 있는 걸로 보인다"면서도 "우리 당 주장처럼 비례를 폐지시킨다고 해도 지역구에 내보낼 때 상임위별 인재, 지역성을 감안해서 낼 수도 있다. 지역구로만 의원을 뽑는다 해도 각 상임위별로 인재를 배려해서 공천해 의원을 배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중로 바른미래당 의원은 "비례대표의 본래 취지만 보면 필요하지만 지금 정치권에서 하는 건 사실상 전략 공천"이라며 "보스 중심으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추천하는 식으로 돼 있다. 각 당에서 전문분야별로 지역구 공천을 한다면 비례대표가 필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직능대표라면 이 사람이 왜 됐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 실제론 저 사람이 왜 됐는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당의 상층부에 대한 기여도, 논공행상 측면에서 되는 게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직능대표성이 없었다. 정치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치를 계속하기 위한 출발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이 상태라면 비례대표를 늘리고 줄이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파행, 왜곡된 비례대표제의 문제를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정당이 주는 배지인 비례대표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각 당이 자체적으로 정한 룰은 있지만 당 지도부의 사천(私薦)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놨다. 과거를 더듬어 보면 사실상 당 지도부나 실세가 나눠먹기 식으로 비례대표 대상자를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집권여당 민주당의 당헌·당규에는 비례대표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과 위원을 최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당대표가 임명한다고 돼 있다. 또한 당대표가 당선안정권의 20% 이내에서 필요한 후보자(순위 포함)을 선정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을 비례대표로 선정할 것인가에 대해선 "비례대표 후보자 심사에 있어 직능, 세대, 성, 지역 등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안분하되, 정치 신인을 우선 추천하도록 노력한다"는 모호한 기준만 담겨있다.
다른 주요 정당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따라 공천의 계절이 다가오면 각 당은 공천 문제로 시끌시끌했다. 20대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본인을 2번에 배치하고, 당선 안정권 내 4명을 전략 지명하며 '사천 파문'이 일었고, 한국당은 '진박 공천' 논란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필요하지만 시스템 개혁 필요하다" 의견도
반면 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하고, 패스트트랙에 오른 안처럼 수도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최도자 바른미래당 의원은 "현재로선 비례대표 의원이 부족하다고 본다"며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주현 민주평화당 의원도 "비례대표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다선 의원들은 기득권이라 볼 수 있는 내용을 개혁하지 못한다. 정치신인이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 교수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지만 정치 신인, 여성 등의 의회 진출을 봤을 때는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며 "비례대표 수도 늘려야 한다. 청년, 여성 등 소수의 목소리가 아직도 반영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비례대표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의석을 늘린다는 주장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투명성·공개성을 확보하는 게 가장 우선돼야 하고, 제도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례대표 의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현 비례대표제 운영에는 문제가 있고, 취지대로 운영되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결국 국회와 정당이 투명한 운영과 역할에 맞는 활동 등을 통해 국민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비례 대표 증원, 폐지 문제를 떠나 비례대표제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