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환의 '靑.春'일기] 불 더 키우는 청와대 청원답변
입력: 2019.06.14 05:00 / 수정: 2019.06.14 05:00
청와대가 최근 정당 해산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한 이후 정국이 또 술렁이고 있다. 노영민(가운데) 청와대 비서실장과 강기정(오른쪽)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 1월 국회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예방한 모습. /남윤호 기자
청와대가 최근 '정당 해산'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한 이후 정국이 또 술렁이고 있다. 노영민(가운데) 청와대 비서실장과 강기정(오른쪽)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 1월 국회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예방한 모습. /남윤호 기자

野, 미우나 고우나 협치 대상이자 국정 파트너

[더팩트ㅣ청와대=신진환 기자] 지난 11일 서울 종로 삼청동에서 신촌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일종의 직업병이 도졌다. 종종 택시를 타면 민심을 들어보기 위해 기사와 대화하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체감 경기는 어떤가요?"라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50~60대처럼 보이는 기사는 "죽겠지 뭐"라고 답했다. 이내 "그런데 언제 경기가 좋았던 적이 있나"라며 무언가 체념한 것처럼 말했다.

정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정치권은 어떤 것 같나요?"라고 물었다. 한숨부터 내쉰 기사는 "하고많은날 싸움박질이나 하고 일은 안 하고 대체 뭐 하는지 모르겠다"며 다소 언성을 높였다. "그럼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 운영을 잘 하고 있는 것 같냐"는 물음에는 '타다' 서비스 퇴출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지하는 정당은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다소 장황했지만, 요지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었다. 내년 총선에서는 '덜 나쁜 놈'에게 한표를 행사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정치인은 다 나쁜 놈'이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그가 꺼낸 말이 강한 인상을 줬다. "언제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한 적이 있었나요."

강기정(사진) 청와대 정무수석은 13일 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는 이 상황이 마치 청와대 답변 때문인 것처럼 발언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고 이날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전했다. /남윤호 기자
강기정(사진) 청와대 정무수석은 13일 "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는 이 상황이 마치 청와대 답변 때문인 것처럼 발언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고 이날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전했다. /남윤호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북유럽 3개국(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순방을 떠났건만, 여전히 청와대는 바쁘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야권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의 해산 청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청와대가 답변을 내놓은 이후 부쩍 심화했다.

지난 11일 오전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은 정당 해산 요구 청원(한국당 180만 명, 민주당 30만 명)에 "국민이 우리 정당과 의회정치에 준엄한 평가를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파행 중인 국회를 겨냥해 책임을 묻는 것으로 읽혔다. 청와대 처지에서 보면 추경 처리가 시급한데, 공전하는 국회가 야속할 것 같다.

청와대는 이튿날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청원에는 "일하지 않고 헌법을 위반하며 국민을 무시하는 국회의원은 국민이 직접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며 "현재 계류 중인 국회의원 국민소환법이 이번 20대 국회를 통해 완성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답변을 내놨다. '일하지 않는'이라는 발언에서 개점 휴업인 국회를 정면 비판하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한국당을 비롯한 야당은 일제히 청와대를 비판하고 있다. 청와대가 국회를 존중하지 않고 야당을 압박한다는 이유를 든다. 야당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청와대가 국민청원 답변을 이용해 야당 책임론을 내세워 민주주의의 근간인 3권분립을 흔든다는 말도 나온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13일 국회에서 열린 재해 및 건전재정 추경 긴급토론회에서 청와대가 야당을 조롱하고 압박하면서 재를 뿌리고 있는데 어떻게 국회를 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남윤호 기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13일 국회에서 열린 '재해 및 건전재정 추경 긴급토론회'에서 "청와대가 야당을 조롱하고 압박하면서 재를 뿌리고 있는데 어떻게 국회를 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남윤호 기자

청와대는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3일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일 뿐이고 자유한국당과 다른 야당을 비난한 것은 아니다"라며 "있는 그대로 답변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아가 강 수석은 같은 날 "국회가 열리지 않는 이 상황이 마치 청와대 답변 때문인 것처럼 발언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책임이 야당이 오해할 소지가 있는 답변을 내놓은 청와대에 있는지, 민생을 뒷전으로 미룬 국회에 있는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이번 청와대가 내놓은 국민 청원 답변은 다소 아쉽다. 정당 해산과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청원은 원론적인 수준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건조하게 답변을 내놓았다면, 야당이 발끈했을까.

또한 국회의 행태를 국민이 지켜보고 있고, 청와대의 답변대로 내년 총선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심판을 내릴 것이다. 청와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을 키운 셈이 됐고, 정국은 더 꼬였다. 입법 기관인 국회가 사실상 제 기능을 거의 못 하고, 야당은 청와대에 각을 세운다. 어찌 됐든 '미우나 고우나' 야당은 국정 운영의 파트너다. 국회 정상화와 협치를 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청와대가 야당을 포용하는 답변을 내놨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한 적 있느냐"는 택시기사의 말은 행정부 최고기관인 청와대도 포함하는 듯하다.

shincomb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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