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취재기] 평화의 도시 하노이 '갑분싸'…"김정은·트럼프 너무해" <상>
입력: 2019.03.03 00:03 / 수정: 2019.03.03 01:42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기대와 달리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기 위해 회담장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근처에 나온 현지인들. /하노이(베트남)=임세준 기자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기대와 달리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기 위해 회담장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근처에 나온 현지인들. /하노이(베트남)=임세준 기자

[더팩트ㅣ하노이(베트남)=이원석 기자] 하노이는 참 평화로웠다. 지난달 24일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 하노이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도로엔 질서가 없었고, 클랙슨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지만, 누구 하나 인상 쓰는 사람이 없었다. 상점 앞에 앉아 물건을 파는 상인들, 길가에서 아주 낮은(사람 무릎 높이의) 간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현지인들, 손에 든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목적지를 찾아가는 관광객들, 하노이에선 모두가 여유로워 보였다.

북미회담 준비가 한창이었다. 회담과 관련된 곳곳에선 낡은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등 보수 작업이 진행됐고, 거리거리마다 북미회담 관련 현수막이 걸렸다. 고개만 돌리면 북한 인공기와 미국 성조기가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 취재진이 상주할 국제프레스센터 등도 점차 모습을 갖추며 만반의 준비가 돼 가는 모습이었다.

베트남 현지인들이 25일 북미정상회담 주요 장소가 밀집한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서 <더팩트> 취재진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하노이(베트남)=이원석 기자
베트남 현지인들이 25일 북미정상회담 주요 장소가 밀집한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서 <더팩트> 취재진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하노이(베트남)=이원석 기자

사람들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 근처 호안끼엠 호숫가에서 현지인들로부터 북미회담에 대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다. 호안끼엠 호수는 하노이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로 넓은 호수 주변에 산책로, 휴식 공간 등이 잘 조성돼 있어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평화' 두 글자가 딱 떠오르는 장소다.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한 중년 여성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취재진인데, 인터뷰를 할 수 있냐'고 물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회담에 대한 견해를 묻자 이 여성은 "북미회담을 응원한다"며 "평화로운 베트남에서 (회담이) 개최돼 안심이 되고, 이번 회담을 통해 북미 양국이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성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북미회담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기대를 풀어놨다.

옷가게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하노이 회담 기념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었다. 한 상점에 걸린 북미 정상 프린팅 티셔츠. /이원석 기자
옷가게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하노이 회담 기념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었다. 한 상점에 걸린 북미 정상 프린팅 티셔츠. /이원석 기자

호안끼엠 호수 근처 상점들의 '북미회담 마케팅'이 눈에 띄었다. 옷가게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하노이 회담 기념 티셔츠를 팔았다. 처음엔 '저게 팔릴까?'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많은 현지인, 관광객이 옷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티셔츠에 관심을 보였다. 직접 입어보고 구매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자신의 사이즈를 찾느라 애를 먹는 듯했다. 두 번이나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더니 딱 맞는 사이즈를 찾았다. 그리곤 두 장이나 구매했다.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더티 버드'란 레스토랑에선 북미회담 스페셜 버거를 판매했다. 두 정상의 이름을 딴 '더티 도날드 버거(트럼프 대통령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 스캔들에서 이름을 따옴)'와 '김정염 버거(김정염 버거는 김정은의 이름에 '맛있다(yummy)'는 뜻의 영어를 붙여 지은 상품명). ', 두 가지 메뉴였다. 찾아가 직접 먹어봤다. 솔직히 조금 느끼했다. 하지만 레시피와 맛이 독특했고, 정말 푸짐했다. 아무렇게나 지은 메뉴는 아닌 것 같았다.

호안끼엠 호수 근처 레스토랑 더티 버드에서 판매한 2차 북미정상회담 기념 더티 도널드 버거. 이곳에선 김정염(yummy) 버거도 함께 팔고 있다. /이원석 기자
호안끼엠 호수 근처 레스토랑 '더티 버드'에서 판매한 2차 북미정상회담 기념 '더티 도널드' 버거. 이곳에선 '김정염(yummy)' 버거도 함께 팔고 있다. /이원석 기자

영국인 매니저 그렉 씨는 "하노이 회담은 큰 이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즐겁게 이를 기념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언론에서 이렇게 주목받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게 상당히 주목받아서 11개국에 소개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웃었다. 마침 현지 교민 가족이 외식을 나와 두 버거를 주문해 먹고 있었다. '맛이 어떠냐'고 묻자 가족은 "정말 맛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박은준(12) 군은 한반도기를 꺼내 들며 "베트남에서 북미회담이 열리니 기분이 정말 놀랍고, 빨리 북미회담이 잘 돼서 백두산이나 금강산에도 가고 싶다"고 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도착한 뒤 하노이는 뜨거웠다. 특히 두 정상이 처음 만난 지난달 27일엔 사람들이 몰려 회담장 근처가 마비됐다. 현지인들은 가족, 커플 단위로 나와 두 정상이 호텔로 들어가고 나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구경 나온 관광객도 보였다. 마치 축제 같았다. TV 중계 속 두 정상의 분위기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

현지인 링(여·18) 씨는 "지나가다가 소식을 듣고 왔는데 (두 정상)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쉽다. 이번 회담이 잘 돼서 북한이 베트남처럼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녀들과 함께 두 정상의 모습을 보기 위해 메트로폴 호텔까지 나왔다는 반(남·40) 씨도 "북미회담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내는 회담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확대 정상회담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북미 정상은 예정했던 오찬과 서명식을 취소했다. /하노이(베트남)=AP.뉴시스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확대 정상회담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북미 정상은 예정했던 오찬과 서명식을 취소했다. /하노이(베트남)=AP.뉴시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하노이의 분위기는 불과 하루 만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28일 오전 일찍부터 만난 두 정상은 단독 회담과 확대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후 기념 오찬과 서명식만을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은 일정이 모두 취소됐단 속보가 전해졌다. 회담장 앞엔 두 정상의 차들이 대기했다. 곧 두 정상은 회담장을 빠져나와 각각 숙소로 흩어졌다.

평화롭던 하노이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다'라는 의미의 신조어)였다. 전 세계에서 모인 취재진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 축제 같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현지인들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흐엉(여·25) 씨는 "좋은 결과를 기대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회담이 결렬된 뒤 김 위원장이 숙소인 멜리아 호텔로 들어간 뒤 두문불출할 때, 호텔 앞에서 만난 베트남 한 언론사의 기자는 "정말 너무하다. 두 사람 때문에 베트남마저 우울감에 빠졌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일정을 당겨 회담 종료 약 4시간 만에 하노이를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고맙다", "대단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다음 날(1일) 응웬 푸 쫑 베트남 주석을 만났다. 환영 행사에서 김 위원장의 표정은 전날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굳어 있었다. 이후 김 위원장도 예정보다 약간 빨리 2일 오전 베트남을 떠났다. 김 위원장도 베트남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들의 감사가 공허했던 탓일까. 평화롭던 하노이는 두 정상이 떠나고 난 뒤 왠지 고요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전봇대마다 달렸던 북미회담 현수막들만 무미건조하게 펄럭였다.

lws20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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