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취재기] 김복동 할머니가 떠난 자리…'김첨지의 나라' 되지 않기를
입력: 2019.01.30 05:00 / 수정: 2019.01.30 08:18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떠난 자리엔 그가 생전에 못다 이룬 소망이 남았다. 김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설립한 길원옥 할머니가 이날 빈소에서 영정을 황망히 바라보는 모습. /신촌=김세정 기자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떠난 자리엔 그가 생전에 못다 이룬 소망이 남았다. 김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설립한 길원옥 할머니가 이날 빈소에서 영정을 황망히 바라보는 모습. /신촌=김세정 기자

[더팩트ㅣ신촌=임현경 기자]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죽은 아내의 온기없는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며 이같이 말한다. 아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설렁탕을 사왔지만, 아내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후였다.

누군가는 김첨지를 '말은 거칠어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아내를 아꼈던' 애처가로 기억하겠지만, 필자가 바라보는 김첨지는 지독히 '나쁜 사람'이다. 김첨지는 아내가 한 달이 넘도록 기침을 하는데도 의사에게 보이기는 커녕 약 한 첩 쓰지 않았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병이란 놈에게 약을 줘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신조에 충실한 탓이었다.

그는 익지도 않은 조밥을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난 아내의 뺨을 후려갈겼다. 같이 있어달란 아내의 요청을 뿌리치고 일을 나갔고, '운수 좋게' 큰 돈을 번 뒤에는 불길한 예감을 회피하기 위해 선술집에서 술을 들이부으며 귀가를 늦췄다. 그동안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숨을 거뒀고, 아이는 배설물이 흘러넘치는 기저귀를 차고서 울다 지쳐 빈젖을 빨았다.

29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다녀간 정치인사들의 모습은 꼭 김첨지와 닮아있었다. 김 할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부르짖어도 귀를 닫고 눈 하나 꿈쩍 않던 이들이, 할머니가 숨을 거둔 뒤에야 찾아와 애도를 표하며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위안부 피해자와 전시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한 여성인권운동에 힘썼다. 김 할머니가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촉구한 모습. /이덕인 기자
김복동 할머니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위안부' 피해자와 전시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한 여성인권운동에 힘썼다. 김 할머니가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촉구한 모습. /이덕인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 할머니는 대장암을 앓고 있던 지난해 9월까지도 외교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철회와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했다. 당시 할머니는 "우리가 위로금을 받으려고 이때까지 싸웠느냐. 1000억 원을 준다고 해도 받을 수 없다"며 "우리를 보러 오지도 않는 사람들이 할머니들을 팔아 그 돈으로 자기들 월급을 받는 것이 참 우습다. 세계를 돌아다녀도 우리 같은 나라는 없다"고 비판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체결을 찬성했던 의원들은 김 할머니의 빈소에서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빈소를 찾은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과거 합의를 찬성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제 개인적 입장은 고인을 비롯한 할머니들의 뜻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고 짧게 답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1월 한국당 원내대표였을 당시 JTBC '뉴스룸 신년특집 대토론'에 출연해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협상의 잘못된 문제를 끄집어내 국가의 연속성을 부정하며 국제 사회의 신뢰와 외교 관계를 깨트리는 것은 문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당시 북핵 위기가 아주 엄중해 한·미·일 공조가 상당히 중요한 상황이었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할 수 있다"며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과 절망을 아주 작고 성가신 '빈대'에 빗대기도 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 역시 이날 빈소에 왔다. 그는 취재진 앞에서 "일본에게 다시 한번 촉구한다. 사과에 인색하지 말라"며 "유족들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줄 수 있는 법안 발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 원내대표는 한일 '위안부' 협상 당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아쉬움과 한계가 있지만 외교적 협상으로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 찬성했던) 자유한국당 조문 깃발이 오면 던져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김 할머니의 빈소를 떠나는 모습./김세정 기자
이용수 할머니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 찬성했던) 자유한국당 조문 깃발이 오면 던져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김 할머니의 빈소를 떠나는 모습./김세정 기자

"왜 10억 엔에 우릴 팔아먹어요. 자유한국당에서 혹시라도 조문 깃발이 오면 던져버리고 싶어요."

조문을 마치고 나온 이용수(91) 할머니는 참았던 울화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28년 동안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그런데 (합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김기춘)과 일본이 비밀협상을 하고 우리는 듣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할머니는 "너무 억울해 세계를 돌아다녔다"며 "200살까지 살아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겠다"고 성토했다.

할머니들의 바람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전부가 아니다. 김 할머니는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전 세계 전시 성폭행 피해자들을 돕고자 했고, 최종적으로는 '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남북 통일 역시 "우리들과 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분들의 후손은 마음놓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김 할머니는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나비 기금'을 설립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에게 대신 사죄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를 드린다.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열심히 지원하겠다"며 "각국 나라에서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되도록 힘을 써주면 좋겠다"며 연대를 이야기했다.

김 할머니는 이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지만, 그가 못다 이룬 소망은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 이것은 남아있는 사람들, 김 할머니의 빈소에 찾아왔던 모두의 몫일 테다.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46명이었던 생존 피해자는 3년이 지난 현재 겨우 23명이다. 평균 나이는 91세에 달한다. 설렁탕을 가져가도 먹을 아내가 사라진 김첨지가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ima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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