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아집 버리고 손 잡아야" 100세 노인의 간절한 '버킷리스트'
입력: 2018.10.03 00:25 / 수정: 2018.10.03 00:25
2일 제22회 노인의 날을 맞은 가운데, 우리 사회의 어르신 노인들은 어떤 심경일까. 올해 100세가 된 유칠상 어르신은 기자와 필담을 통해 꼭 보고싶은 우리나라를 설명했다. /대한상공회의소=임현경 인턴기자
2일 제22회 노인의 날을 맞은 가운데, 우리 사회의 '어르신' 노인들은 어떤 심경일까. 올해 100세가 된 유칠상 어르신은 기자와 필담을 통해 '꼭 보고싶은 우리나라'를 설명했다. /대한상공회의소=임현경 인턴기자

"어른다운 노인으로" 제22회 노인의 날 기념식 현장

[더팩트ㅣ대한상공회의소=임현경 인턴기자] "고마워, 감사해. 노인을 위해서 이렇게 해주니까. 오래 살아야겠다." 노인의 날을 맞이한 100세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이윽고 그는 이 사회에서 '오래 살아'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일 낮 12시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는 보건복지부가 주최, 대한노인회가 주관한 '제22회 노인의날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의 진짜 주인공, '노인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참석한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인의 날을 맞은 소감'을 물었을 땐 짧은 대답이라도 돌아왔지만, '우리 사회에 바라는 것'을 묻자 난감한 침묵이 흘렀다. 밥상머리에서 정치 얘기는 꺼내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오찬을 위해 둥근 탁자에 좁은 간격으로 둘러앉은 그들에게 정치는 반가운 화제가 아니었다. 특히 예민한 사회 현안인 '복지'와 '대북 정책'을 입에 올리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 체코, 베트남, 영국, 아르헨티나 등 해외 대한노인회 회원들까지 함께 둘러앉아 오찬을 즐겼다. 행사장에 대한노인회 회원들이 각 지역별로 모인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이날 행사에서는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 체코, 베트남, 영국, 아르헨티나 등 해외 대한노인회 회원들까지 함께 둘러앉아 오찬을 즐겼다. 행사장에 대한노인회 회원들이 각 지역별로 모인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기자가 다가가자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미루던 이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한 시민은 "오늘은 술(오찬으로 제공된 와인)을 마셔 기분이 좋다"며 "그런 이야기를 오늘 이 자리에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며 대답을 고사했다. 또 다른 시민은 "지역마다 말이 다를 텐데 굳이 싸움 붙을 일 있냐"며 손사래를 쳤다. 충남 지역에서 온 그의 왼쪽 원탁에는 대구 지역이, 뒤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전남과 해외 지역민들이 모여있었다.

연이은 퇴짜 끝에 만난 박종애 대한노인회 경기광명시지회장은 "대통령님께 건의하고 싶은 게 벌써부터 있었다"며 노인 일자리 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박 씨는 지혜가 넘쳐흐르는 노인들이 너무 많다며 일자리 지원 정책의 확대를 촉구했다. 한 표창 수상자가 남편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박 씨는 "지혜가 넘쳐흐르는 노인들이 너무 많다"며 일자리 지원 정책의 확대를 촉구했다. 한 표창 수상자가 남편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박 씨는 "지금 65세 이상이 퇴직을 하는데, 지혜롭고 상식과 지식이 넘쳐흐르는 노인들이 너무 많이 있다"며 "그분들이 건강할 때 현세대에 맞는 교육을 시켜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재활용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사회가 더 많이 발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기초노령연금 대상자 확대를 촉구하며 "그분들(대상자)에게 저렴한 수고비라도 준다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며 "또 건강이 안 좋은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노인네들이 그 (전쟁의) 시대를 겪었다"며 "아무리 해준다고 하더라도, 사회에서 지금 대우가 너무 소홀하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노인들에게도 존중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 씨는 "한반도 통일은 그 시대를 겪은 우리 노인들이 끝까지 뒷받침할 것이다"며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올해 100세가 된 유칠상 씨는 정치인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실망만 안겼다고 말했다. 유 씨가 인터뷰 중 사진 촬영에 응한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올해 100세가 된 유칠상 씨는 "정치인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실망만 안겼다"고 말했다. 유 씨가 인터뷰 중 사진 촬영에 응한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조심스런 요청이 무색할 만큼 호쾌히 인터뷰에 응한 이도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유칠상 씨는 기자가 다가오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올해 100세를 맞은 노인 1343명 중 대표로 이날 행사에 참석해, 대통령 내외의 축하카드와 예로부터 임금이 내렸다고 전해지는 장수지팡이 청려장을 받았다.

그의 딸 유미 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말씀하는 걸 어려워하시지만, 종이와 펜만 쥐여주면 만사형통이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필담을 나누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글씨를 보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 씨가 첫 글자 '우리나라'를 적는 순간, 그의 딸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근사한 필체로 정갈하게 줄 맞춰 선 글자들은 괜히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뭉클하게 했다.

유 씨는 "방금 다녀간 정치인들이 어르신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는 물음에 '우리나라 정치인이 지나치게 국빈생활을 해요. 우리 서민은 좀 나은 환경을 바라지만, 어째 저째 기다려봐야 여전히 실망만 해요'라고 적었다. 그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가 말을 안 해도 다 느끼고 있어. 국민들이 다 알아. 말로는 뭐 도와달라 하는데 믿지를 않잖아. 국민들도 국회의원들을 못 믿어.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 말이 그 말이고, 에휴. 그냥 혼자 참는 거야."

유 씨가 글자만으로는 답답했는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혼자 참으시면 어쩌냐, 권리를 행사하셔야 한다"고 말하자, 유 씨는 "나뿐 아니라 다들 그래"라며 주변의 노인들을 두루 가리켰다. 이젠 말뿐이 아닌, 진심으로 서민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 씨는 남한 사람들은 이북 사람들을 잘 모르고 있다며 아집을 버리고 힘을 합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 씨와 기자가 나눈 필담 내용 중 일부. /임현경 인턴기자
유 씨는 "남한 사람들은 이북 사람들을 잘 모르고 있다"며 "아집을 버리고 힘을 합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 씨와 기자가 나눈 필담 내용 중 일부. /임현경 인턴기자

'지금 대통령이 이북과 화목하려고 애쓰는데 이북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지만, 남한 사람이 의지가 약합니다. 용기를 내 이북하고 손잡아야 통일이 가깝습니다. 아집을 버리고 손잡으면 통일이 빨리 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자 유 씨는 펜을 한껏 꾹꾹 눌러가며 간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송이도 받았다. 집에 송이가 이만큼 (왔다)." 유 씨의 딸은 그가 앞서 문 대통령이 미상봉 이산가족에게 선물한 북한산 송이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유 씨는 평안남도에서 출생했지만, 3살 때 가족과 헤어지고 남쪽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유 씨는 '무지에 의한 공포'를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이 겁이 많아. 우리가 이북 사람들을 미워하잖아.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빨갱이다 뭐다 말을 그렇게 하니까. 근데 그게 아니야. 이북 사람들은 (의지가) 강해. 우리랑 힘을 합치면 더 나은 사람들이야. 요즘도 그러잖아, (정상)회담. 손잡아야 돼. 통일돼야지. 안 되면 안 돼. 좀 더 잘 살려면 통일돼야 해."

이날 내빈들은 축사를 통해 노인의 사회적 역할과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평화당 대표,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정치 인사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2회 노인의날 기념식에 참석하는 모습. /임세준 기자
이날 내빈들은 축사를 통해 노인의 사회적 역할과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평화당 대표,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정치 인사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2회 노인의날 기념식'에 참석하는 모습. /임세준 기자

한편 이날 행사에는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참석해 노인의 사회적 역할과 복지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김병준 위원장은 "이 자리에 서자니 조금 민망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다른 OECD 국가가 노인 빈곤율이 12~13%인데, 우린 50% 가까이 된다"며 "어르신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시는지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경험과 지혜는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며 "어르신들 다시 한번 이 나라가 처한 어려움 살펴주신다면 우리나라 더더욱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손학규 대표는 "이 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의 부진을 언급했다. 그는 "시장이 돌아가지 않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게 노인층이다"며 "여러분들 자신이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국제 경제 전반에 대한 기본 틀을 활성화 해주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정미 대표는 "어르신들은 오랜 삶 속에서 깊이 각인된 본능 같은 게 있다고 믿는다"며 "그것은 안전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갈망일 수도 있고, 자식 세대가 공동체를 이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지혜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노인과 아이가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 정의당이 많이 노력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ima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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