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국민연금 개편 논란과 '설익은 밥'
입력: 2018.08.15 00:00 / 수정: 2018.08.15 00:00

국민연금 개편을 놓고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박능후(사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정부안으로 확정된 게 아니다라며 12일 진화에 나섰다. /더팩트DB
국민연금 개편을 놓고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박능후(사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정부안으로 확정된 게 아니다"라며 12일 진화에 나섰다. /더팩트DB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압력밥솥이 없던 시절 냄비로 밥을 하다 보면 가끔 생 쌀밥을 먹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뜸을 더 들여야 하는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뚜껑을 연 탓에 설익은 밥을 먹어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학창 시절 자취생들 대부분은 이런 경험이 한두 번씩은 다 있을 것으로 본다. 캠핑의 인기가 상당한데 호기롭게 밥을 하겠다고 나섰던 이들 중에도 설익은 밥을 먹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밥이야 설익으면 대충 먹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경험으로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국민연금 개편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설익은 밥이 떠오른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을 인상하고 연령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내용에 따르면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8%포인트 또는 4%포인트 인상, 소득대체율 45% 유지 또는 40%로 단계적 인하, 연금수령 개시 연령도 65세에서 68세로 상향 조정하는 방향이다.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12일 본인 명의로 "자문위원회(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가 오는 17일 제도개선방안 공청회에서 밝힐 자문안을 만드는 과정에 있는데, 이것이 정부안처럼 언급돼 상당히 당혹스럽다"며 국민적 분노를 진화하고 나섰다.

정부의 정책은 설익은 상태로 내놓을 경우 혼란과 비난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시쳇말로 '설레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복지부는 최근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8%포인트 또는 4%포인트 인상, 소득대체율 45% 유지 또는 40%로 단계적 인하, 연금수령 개시 연령도 65세에서 68세로 상향하는 방향으로 개편을 논의 중이다. /더팩트 DB
복지부는 최근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8%포인트 또는 4%포인트 인상, 소득대체율 45% 유지 또는 40%로 단계적 인하, 연금수령 개시 연령도 65세에서 68세로 상향하는 방향으로 개편을 논의 중이다. /더팩트 DB

그렇지 않아도 국민에게 국민연금 신뢰는 바닥이다. 이렇다 보니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낸 국민연금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수다. 이런 국민연금인데 연금을 올리고 받는 연령도 높인다고 하니 어느 국민이 이를 좋게 볼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지금 체제를 유지하다간 조만간 국민연금이 고갈되는 문제를 손 놓고 지켜볼 수만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충분한 여론 수렴과 합의 과정도 없이 불쑥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듯한 정책은 그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국민이 낸 세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지지 못할망정 다시 국민의 지갑을 열겠다는 식이니 복지부나 정부를 향한 비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비난이 쇄도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민연금 문제로 여론이 들끓는다는 보도를 보았다. 일부 보도 대로라면 대통령이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고령화 시대에 노후 소득보장이 부족한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당연히 노후소득 보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우리 정부 복지정책의 중요 목표 중 하나인데 마치 정부가 정반대로 그에 대한 대책 없이 국민의 보험료 부담을 높인다거나,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춘다는 등의 방침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알려진 연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복지부를 질타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이런 발언과 국민적 비난에 복지부의 국민연금 인상 등은 다시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비난과 질타가 있고 난 뒤에야 다시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일부 부처에서 설익은 안을 내놓았다가 다시 조정했던 양상과 비슷한 상황이다.

흔히 어떤 리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서 밑에 사람들이 고생할 경우를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이산이 아닌가 봐'라고 말이다. 정부 부처의 장관 혹은 어떤 부서의 리더라면 보다 진중할 필요가 있다. 또, 국민의 지갑과 직결된 문제를 다루는 위원들이라면 더욱더 관련 내용이 확정되기까지 자중할 필요도 있다. 더불어 국민의 니즈 또는 조직원들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을 거친 여론 수렴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연금 개편 논란이 불거지자 13일 대통령이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은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문 대통령./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연금 개편 논란이 불거지자 13일 "대통령이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은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문 대통령./ 청와대 제공

우리나라 기업 문화는 과거 '외부고객 만족'에만 열을 올린 적이 있었다. 매출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 할수록 직원들의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다 사회문화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기업들이 눈을 돌린 곳은 '내부고객 만족'이었다.

내부고객, 즉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아가자 애사심도 업무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는 설익은 제도를 내놓아봐야 비난과 거센 저항에 부닥칠 뿐이다.

대통령, 청와대 수석 및 직원들, 정부 부처 장관과 공무원, 정치인 등 이른바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는 이들이라면 '내부고객'인 국민의 만족도를 위해 최상의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제도라도 공공의 이익과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국민의 희생만을 강요해 지갑을 여는 건 말 그대로 혈세(血稅)에 불과하다.

지난해 김상곤 교육부 장관이 대입수능 개편 유예 문제를 꺼냈다가 국민적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 또한 설익힌 밥을 국민에게 내놓았다가 뭇매를 맞은 예이다. 이런 정부 부처의 설익은 정책이 국민에 알려지고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결국, 수습은 대통령의 몫이 되고 만다. 이번 국민연금 개편 문제도 그렇다.

문 대통령은 "정부 각 부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과 적극 소통하면서 국민이 알아야 할 국정 정보를 정확하게 홍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자세로 업무에 임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내각을 구성하는 정부 부처의 장관과 공무원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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