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희의 '靑.春'일기] 김종필 전 총리와 독대, 그날의 유훈…"다만 사라질 뿐이다"
입력: 2018.06.25 00:05 / 수정: 2018.06.25 06:38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에 대한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2월 고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지키는 김 전 총리의 모습./배정한 기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에 대한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2월 고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지키는 김 전 총리의 모습./배정한 기자

미리 밝혀둡니다. 이 글은 낙서 내지 끄적임에 가깝습니다. '일기는 집에 가서 쓰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쓰냐고요? '청.와.대(靑瓦臺)'. 세 글자에 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생활하는 저곳, 어떤 곳일까'란 단순한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靑.春일기'는 청와대와 '가깝고도 먼' 춘추관에서(春秋館)에서 바라본 청춘기자의 '평범한 시선'입니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청와대=오경희 기자] 6월의 평범한 주말이던 23일 토요일 오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부터 2박 4일간 러시아를 순방 중이었다. 이 기간 춘추관은 잠시 숨을 돌린다. 그러나 이내 사이렌이 울렸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별세 소식이 오전 10시께 전해졌다.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계 원로의 별세는 정치부에선 '대사(大事)'다. 더구나 한국 현대정치를 이끌었던 이른바 '3김(金)'의 마지막 퇴장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2009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2015년 서거했다.

청와대는 곧바로 "삼가 조의를 표한다"며 김 전 총리의 별세를 애도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출입기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며 "시와 서, 화를 즐겼던 고인은 걸걸한 웃음으로 각박하고 살벌한 정치의 이면에 여백과 멋이라는 거름을 주었다"고 추모했다.

'손때와 족적.' 김 전 총리의 삶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한다. 영욕의 부침을 거듭한 '풍운아'의 삶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했다. 사진은 김 전 총리(오른쪽)가 2016년 3월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김종필 증언록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모습./이새롬 기자
김종필 전 총리는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했다. 사진은 김 전 총리(오른쪽)가 2016년 3월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김종필 증언록'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모습./이새롬 기자

하지만 1979년 10·26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타계하자 JP는 다른 길을 걸었다. YS, DJ와 때로 손을 잡거나 등을 돌리며 민주화 과정에 역할을 했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정치현실을 보여줬다. 또, 대권과 인연이 없어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그런 JP를 5년 전 독대한 적 있다. 어느 봄날, 예술의 전당에서였다. JP는 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곳에서 JP는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재활운동 중이었다. 당시 87세의 JP는 휠체어를 탔고, 머리는 희끗했다. 2004년 정계은퇴를 한 뒤 2008년 말 뇌졸중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았다.

JP의 기세는 여전했다. 뜻밖의 손님을 지그시 바라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눈빛과 시선, 목소리는 묵직했다. 카리스마를 뿜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JP는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한참 인생 후배를 앞에 앉혀 놓고 역사를 읊었다. 띄엄띄엄 과거를 되돌아보는 JP의 눈빛에서 회한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말이 끝날 무렵 정치 현안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때는 박근혜 정부 2년 차였다.

"노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JP는 인천상륙작전(1950년)을 지휘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퇴역하면서 남긴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이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 전장을 누빈 그 기세는 결코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변가'로도 알려진 JP가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말이기도 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별세한 23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이 놓혀있다./이선화 기자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별세한 23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이 놓혀있다./이선화 기자

생전 남긴 말대로 JP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풍운아'의 일대기에는 마지막 길에도 찬바람이 분다. 정부가 김 전 총리에 대해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방침을 정한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민주화 과정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공을 인정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쪽은 5·16 쿠데타에 가담한 '역사적 과오' 등을 이유로 든다.

스스로도 이를 예견했을까. 지난 2015년 숙환으로 부인 박영옥 씨를 먼저 보내며 JP는 정치 후배들에게 날카로운 충고를 했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고 말이다. 이는 JP의 유훈으로 남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 '이름'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몫이 됐다.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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