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희의 '靑.春'일기] '4479자'에 담은 문재인 대통령의 '경고'
입력: 2018.06.20 05:00 / 수정: 2018.06.20 05:00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해 청와대 참모진들과 전 직원들에게 6.13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데 대해 격려와 동시의 당부의 말을 했다. 사진은 지난 18일 열린 수보회의 전경./청와대 페이스북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해 청와대 참모진들과 전 직원들에게 6.13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데 대해 격려와 동시의 당부의 말을 했다. 사진은 지난 18일 열린 수보회의 전경./청와대 페이스북

미리 밝혀둡니다. 이 글은 낙서 내지 끄적임에 가깝습니다. '일기는 집에 가서 쓰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쓰냐고요? '청.와.대(靑瓦臺)'. 세 글자에 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생활하는 저곳, 어떤 곳일까'란 단순한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靑.春일기'는 청와대와 '가깝고도 먼' 춘추관에서(春秋館)에서 바라본 청춘기자의 '평범한 시선'입니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청와대=오경희 기자] 초등학교 때였다. 선생님이 성적통지표를 나눠줬다. 단짝 친구는 손에 받아든 종이를 들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수(秀)'가 가득했다. 친구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엔 칭찬하겠지….' 퇴근길 아빠를 기다리며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러나 친구 아빠의 반응은 "우(優)가 두 개네, 다음엔 더 열심히 해라"라는 게 전부였다. 서러웠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훗날 친구 아빠는 "자만심을 가질까 봐"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린아이한테 너무했다 싶다.

문재인 대통령을 보며 그런 친구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오후 수석·보좌관 회의(이하 수보회의)를 주재했다. 6·13 지방선거 후 열리는 회의라 문 대통령의 '발언'에 출입기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선거 이후 정부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 있을 것이고, 경제 구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 하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보회의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매주 월요일 정례적으로 열리며,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을 도입했다. 청와대 1급 이상 고위직들만이 아닌 전 직원들에게 생중계됐다. 이는 지난해 문 대통령이 제안했다.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토론과 소통을 통해 국정철학을 폭넓게 공유하기 위한 것이란 게 청와대의 설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대해 갚아야 할 외상값이 많다하더라도 우선은 기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대해 "갚아야 할 외상값이 많다하더라도 우선은 기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청와대 제공

회의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국정운영을 논의하는 수보회의 중대성과 보안상 출입기자들에게는 통상 문 대통령의 모두발언까지만 공개된다. 예상대로 문 대통령은 지방선거 결과를 평가하며 참모진과 1기 내각을 격려한 동시에 '당부의 말'을 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민심은 문재인 정부를 재신임했다.

그 '당부의 말'은 온화함과 매서움을 동시에 담았다. 문 대통령은 상대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긍정의 언어로 먼저 말해 상대의 수용폭을 넓힌 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얘기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눈길을 끈 점은 모두발언의 분량이었다. 평소와 달리 압도적이었다. 글자 수를 세 보니 무려 '4479자'였다. 최근 한 달 간 수보회의 모두발언은 △6월 11일 863자 △5월 28일 1031자 △5월 14일 1237자 등 평균 1000자 안팎이었다. 모두발언 주제 또한 전부 지방선거 주제에 할애했다. 경제 구조 개혁의 필요성 언급은 없었다.

발언의 첫머리는 "갚아야 할 외상값이 많다하더라도 우선은 기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였다. 그러나 곧바로 주마가편의 '채찍'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까지, 오늘 이 순간까지다. 지난 번에 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한편으로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라고 참모진과 전 직원들에게 각인시켰다. 3분의 2가량을 당부의 말로 채웠다. 문 대통령은 '외상값(국민 기대 충족)'을 갚을 방법으로 유능함, 도덕성, 겸손함 등 3가지를 강조했다.

지난 18일 수보회의는 처음으로 전 직원들에게 생중계 됐다. 사진은 청와대 직원이 업무 모니터로 회의를 시청하는 모습./청와대 페이스북
지난 18일 수보회의는 처음으로 전 직원들에게 생중계 됐다. 사진은 청와대 직원이 업무 모니터로 회의를 시청하는 모습./청와대 페이스북

'4479자'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청와대뿐만 아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메시지 같았다. 추미애 현 대표의 임기가 끝나 민주당은 차기 당권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자천타천 거론되는 후보만 20여 명에 이른다. 내부 경쟁은 자칫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선거 승리에 힘입어 최근 내심 입각을 바라는 여권발 '개각설'까지 흘러나온다.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의 골도 깊어질 수 있다. 우리 정치사를 보더라도 앞에 선거에서의 승리가 그 다음 선거에서는 아주 냉엄한 심판으로 그렇게 돌아왔던 그런 경험들을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압승'이 '양날의 칼'이란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싹쓸이 승리를 거뒀다. 이는 영원하지 않았다. '잘 나갈 때 조심하지 않았던' 한국당에 민심은 심판의 채찍을 휘둘렀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에 이를 기억하라는 게 문 대통령의 메시지로 읽혔다. 조국 민정수석은 수보회의에서 문 대통령에게 '과거 정부' 국정상황의 교훈을 보고하며 '집권세력 내부 분열'과 '독선'을 첫 번째로 꼽기도 했다. '과거 정부'는 '박근혜 정부'라는 게 중론이다. 촛불의 선택을 받은 문 대통령이 다시 '겸손'을 말하는 이유다.

"잘 나갈 때 조심하라!"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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