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서초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그리고 KTX 해고 노동자 측과 김환수 대법원장 비서실장의 면담은 '색다른 연대'의 장이었다. 사진은 법원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30일 오후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동고발 및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서초=남윤호 기자 |
KTX 해고 승무원과 함께 선 13개 단체 노동자들과 '양승태'
[더팩트ㅣ서초=임현경 인턴기자] "우리는 빵과 장미를 위해 투쟁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런던 프라이드>(2014)엔 이런 가사의 노래가 나옵니다. 배경이 된 1984년 영국은 탄광 노동자들이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내각에 맞섰던 때로, 당시 성소수자들은 광부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기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빵과 장미는 전혀 다른 사물이지만, 우리에게 필요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밥과 라이언(카카오프렌즈)쯤 될까요. 이처럼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두 집단, 광부 노조와 성소수자 연합이 '권리를 찾겠다'는 목표를 위해 손을 잡고 투쟁의 노래를 부른 것이죠.
색다른 연대는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30일 서초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그리고 KTX 해고 노동자 측과 김환수 대법원장 비서실장의 면담은 인턴기자에게 영화처럼 인상 깊은 사건이었습니다.
KTX해고 승무원의 곁엔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와 KTX 해고승무원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있었다. 사진은 법원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동고발 및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남윤호 기자 |
처음엔 취재 일정을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면담을 앞두고 농성을 벌일 거라 생각해 찾아간 대법원에서는 KTX 해고 노동자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큰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전국금속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등 다른 여러 단체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인파 사이로 푸른색 조끼 위 'KTX'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지부장과 정미정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상황실장, 두 사람이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제 농성할 때 이렇게 좀 많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노조 관계자는 갑작스레 취재진이 몰리자 신기한 듯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이날의 면담은 쉽게 이뤄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와 KTX 해고 승무원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전날 대법정 앞에서 2시간 30분가량 시위한 끝에 성사된 것이었습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기습 시위라 미리 몰랐던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쓴다는 핑계로 그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새삼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공동고발 입장발표'에 참여한 단체는 13개였습니다. 모두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청와대에 협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재판과 관련있었습니다. KTX 해고 승무원 측은 면담 전까지 말을 아끼며 그들에게 마이크를 양보했습니다.
제 눈에는 KTX 해고 승무원 측이 자신들에게 쏟아진 언론의 관심을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닿게끔 돕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수십 명의 취재진 앞에서 마음껏 발언할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요.
KTX 해고 승무원 측은 "사법농단은 다른 수많은 노동자와 국민의 삶과 연관된 사안이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김승하 전국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지부장이 대법원장 비서실장과의 면담 내용을 전하고 있는 모습. /남윤호 기자 |
"우리의 권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법원이 돌연 면담을 비공개로 진행하겠다고 통보하자, 노조 측은 "사법농단은 다른 수많은 노동자, 국민의 삶과 연관된 사안이기에 반드시 공개돼야 한다"며 진행을 거부했습니다.
노조 측은 일부 취재진이 면담 시작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로 합의한 후에야 대법원 청사 내로 들어갔습니다.
KTX 해고 승무원 측 면담 참석자는 김승하 지부장, 정미정 상황실장,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 정수용 KTX 승무원대책위 공동대표(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장), 김갑수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었습니다. 성별·종교·직업이 제각기 다른 이들입니다.
불교와 천주교의 종교대통합(?)까지.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나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런던 프라이드>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광부와 동성애자가 무슨 상관이냐'는 회의적인 물음에 한 남성이 아주 당연한 듯 대답합니다.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그 석탄이 전기를 만들면, 이 클럽에 있는 조명을 밝혀주니까."
'우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의 권리가 곧 우리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KTX 해고 승무원 측은 "또 다른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대법원장 면담을 대법원에 요구했다"고 전했습니다. KTX 해고 건뿐만 아니라 여타 재판 관련 노동자들이 사법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와 범위를 확대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앞서 각기 '다른' 이익 집단이 모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익의 범위를 너무도 좁게 한정했던 겁니다. 사실은 모두에게 '권리 보장'이라는 아주 크고도 고루 가져야 마땅한 공익이 있었는데 말이죠.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영화로 끝을 맺자면, <런던 프라이드>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 그에게 동료는 "피켓을 들고 말고와 상관없이 우리가 함께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줍니다.
인턴기자는 언론인으로서 어떤 피켓을 들고, 또는 들지 않고 공익을 위해 힘쓸 수 있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아마도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인턴'을 떼고 기자가 되는 데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imaro@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