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이명박의 '무술옥사'와 유자광의 '무술옥사'
입력: 2018.04.11 00:05 / 수정: 2018.04.11 00:05

이명박 전 대통령은 9일 검찰의 구속기소에 무술옥사라며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사진은 지난달 23일 이 전 대통령이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서울동부구치소로 이동하던 당시./남윤호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9일 검찰의 구속기소에 "무술옥사"라며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사진은 지난달 23일 이 전 대통령이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서울동부구치소로 이동하던 당시./남윤호 기자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그렇지만 이건 아닙니다. 저를 겨냥한 수사가 10개월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댓글 관련 수사로 조사받은 군인과 국정원 직원 2백여 명을 제외하고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수석, 비서관, 행정관 등 무려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가히 '무술옥사(戊戌獄事)'라 할 만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9일 검찰이 구속기소 하자 미리 준비했던 성명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참모진들의 구속을 '정치보복'으로 규정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정치보복'으로 풀이가 가능한 부분은 이 전 대통령의 성명서 곳곳에 있다. 그 중 '무술옥사'를 거론한 부분은 흡사 1589년부터 1591년까지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 사건으로 3년 가까이 동인 1000여 명이 정치적 보복을 입은 것으로 해석된다. 정권을 장악했던 기축옥사로 동인은 몰락했고, 서인은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건이다.

그러나 500년이 흐른 지금도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했다는 확실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부터 현재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무술년(2018년)에 자신과 측근들이 문재인 정부로부터 구속되는 상황을 500년 전 기축옥사와 빗대는 것이 합당한지는 따져볼 부분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억울하고 정치보복으로 규정했지만, 검찰의 기소 내용을 보면 과연 그럴까 싶다.

검찰은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와 횡령 등 14가지 혐의를 중심으로 재판에 넘겼다. 사진은 9일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가 이 전 대통령 구속기소와 관련해 브리핑하는 모습. /임세준 기자
검찰은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와 횡령 등 14가지 혐의를 중심으로 재판에 넘겼다. 사진은 9일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가 이 전 대통령 구속기소와 관련해 브리핑하는 모습. /임세준 기자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다스 비자금 횡령(349억 원대) ▲다스 법인세 포탈(31억 원대) ▲다스 관련 직권남용 ▲삼성 뇌물(67억 원대) ▲국정원 자금 상납(7억 원대) ▲공직임명 대가 금품수수(36억 원대) ▲3402건 대통령기록물 유출 혐의(세부적으로 18개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공소사실 역시 구속영장 청구서에 적시한 범죄사실과 동일한 혐의를 적용했다.

그런데도 이 전 대통령은 "저는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제가 평생 모은 재산 330억 원을 기부해 학생들을 돕는 데 쓰고 있다. 저는 서울시장과 대통령 재임 중 받은 월급 전액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런 제가 무엇이 아쉬워서 부정한 축재를 하고 부당한 뇌물을 받겠습니까?"라고 항변했다.

이 전 대통령의 '무술옥사' 논란을 보면 정여립의 '기축옥사'가 아닌 유자광의 '무술옥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옥사의 내용은 다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인간의 흥망성쇠 과정이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 성종 때인 1477년 '무술옥사'로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한 간통 사건을 두고 벌어진 일인데, 이 사건에는 조선시대 처세의 달인으로 유명한 유자광의 이름이 거론된다.

사진은 지난달 1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피의자 조사 후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는 모습. /문병희 기자
사진은 지난달 1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피의자 조사 후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는 모습. /문병희 기자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문제를 촉발시킨 도승지 현석규를 계속 승진시킨 성종의 조처에 반대하다가 이듬해 5월 결국, 동래(東萊)에 유배되기도 했다. 서자 출신으로 탄탄대로 입지를 다졌던 유자광이 처음으로 유배를 가게 된 배경이 바로 무술옥사 사건이다.

유자광은 무와 문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탁월한 처세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다섯 명의 군주를 모시며 승승장구한 인물로 입지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서자로 태어나 다섯 명의 군주를 모시며 승승장구한 인물이지만, 역사는 그를 모사꾼, 간신, 음모론자로 평가한다. 유자광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모함해 죽였고, 무오사화를 일으켜 당시 조정에 진출해 세력을 모으고 있던 젊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파의 씨를 말린 장본인으로도 기록된다. 물론, 유자광 혼자만의 음모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현대 사회로 보자면 유자광은 흙수저로 태어나 정권의 최정점에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음모론을 제기한 것에서 흙수저들의 롤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전 대통령도 가난한 시절을 보내다 현대건설 사장, 서울시장,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까지 오른 입지전적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마지막은 뇌물, 횡령, 비자금 조성 등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졌다.

유자광은 마지막까지 '원통하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도 억울하고 원통한 것 같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의 범죄 혐의를 지켜본 국민은 더 원통하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할까.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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