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리길성과 현송월, 남도 변하고 북도 변한다
입력: 2018.01.30 05:00 / 수정: 2018.01.30 05:00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평창동계올림픽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지난 22일 저녁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실무회담을 마친 뒤 환송만찬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평창동계올림픽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지난 22일 저녁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실무회담을 마친 뒤 환송만찬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북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북한이 뒤늦게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북한 선수단, 예술단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함께 훈련하는 모습이 소개되는가 하면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합동공연에 K팝이 참가한다는 말도 나온다. 통상 올림픽 개막일이 다가오면 성화 최종주자, 개막식 공연 등에 대한 관심으로 대회 열기가 고조되는데 북풍에 묻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북한은 가장 가까운 나라이지만 또한 가장 먼 나라이다. 1985년 고향방문단, 예술단이 남북을 상호 교차 방문했을 때 리길성 노동신문 편집국장을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고향방문단은 지금으로 얘기하면 이산가족 상봉단이다. 당시 고향방문단 50명, 예술단 50명 등 100명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오갔다. 신문사에 갓 입사한 올챙이 기자였던 필자는 비원(지금 창덕궁)에서 우연히 그와 20분 남짓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정부의 북측 수행원들에 대한 비원 관광일정에 따라 이곳으로 왔다. 당시 안전기획부(지금 국가정보원)는 북측 방문단과 취재기자들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원에서는 별달리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붙잡은 게 리길성이었다. 의욕이 넘쳤던 만큼 서울에 온 소감 등 생각나는 것 몇 가지를 속사포처럼 물었다.

그러자 리길성은 “북한에서는 이런 법이 없다”면서 “취재할 때는 먼저 자기의 소속을 밝힌다”고 점잖게 응수했다. 애송이 기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그래서 ○○신문 ○○○라고 말하자 리 국장은 ‘자신은 노동신문 편집국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강이 왜 이렇게 더럽냐”며 “대동강 물은 깨끗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서울이 민족의 수도인데 잘 보전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또 “용금옥이 아직도 있습네까”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용금옥은 무교동에 있는 오래된 추어탕집으로 선배들을 따라 몇 번 가봤다. 그래서 당신이 그 집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그는 해방 전 서울로 유학을 와 배재중학을 다녔으며 그 때 용금옥에 가서 추어탕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용금옥이 유서깊은 음식점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됐다.

리길성은 또 고약한 행동도 많이 해 남측 관계자들을 골탕 먹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달동네가 보이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거리의 지저분한 모습도 빼놓지 않고 담았다. 물론 그럴 때면 남측 관계자들은 “아,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하고 제지했다. 이처럼 그는 남한의 어두운 측면을 찾으려 했다. 아마 이렇게 한 것은 당시만 해도 남과 북이 누가 더 잘사느냐는 체제경쟁을 하던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남북총리회담이 열리던 1990년대 중반까지 서울로 와 취재했는데 그 이후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마 나이가 많아 현역에서 은퇴했으리라 짐작된다.

남북총리 회담이 열렸을 때 단연 화제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조선 인민의 최대 행복은 이밥(쌀밥)에 소고기국 먹는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빈곤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됐는데 북한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보릿고개 시절의 이야기가 나와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제 체제경쟁은 끝났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누가 잘사는지는 세상이 다 알기 때문이다. 체제경쟁을 하던 ‘리길성세대’도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난 지 오래다. 통일과 민족을 우선시하던 ‘386세대’의 시각도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논란에서 보듯 된서리를 맞았다. 세상은 변한다. 마찬가지로 남과 북도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에 대한 언론의 말초신경적 보도와 과잉보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게 젊은 세대들이다. 평창 올림픽은 남북 관계를 신세대 감각과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새로운 과제로 던져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thefac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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