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현장] '블라인드 채용'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요
입력: 2017.09.14 04:00 / 수정: 2017.09.18 06:24
입사 지원서에 편견이 생길 수 있는 일련의 개인 정보는 기재하지 않고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토대로 채용하는 블라인드 채용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세준 기자
입사 지원서에 편견이 생길 수 있는 일련의 개인 정보는 기재하지 않고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토대로 채용하는 '블라인드 채용'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세준 기자

[더팩트 | 김소희 기자] "저는 ㅇㅇ대학교 마케팅동아리 팀원들과 함께 다양한 공모전에 출전해 입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 경험을 살려서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싶습니다."

몇해 전부터 대규모 '블라인드(Blind) 채용'을 진행해온 국내 굴지의 대기업 신입사원 모집 면접 전형에서 김경아(28·여·가명) 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해당 기업은 입사 지원서에 블라인드 채용 취지에 맞게 출신 지역, 신체 조건, 학력과 같은 항목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원자들에게는 특정 미션이 주어졌고, 김 씨를 포함한 지원자들은 회사가 요구하는 주제에 맞게 기획안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신입사원 전형이었던 만큼 김 씨에게 학교 생활 외 직무 관련 경험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러나 서류 합격자를 대상으로 '다(多) 대 다(多)'로 진행된 면접에서 김 씨와 함께 면접을 보는 다른 지원자들은 너도나도 다른 기업에서 같은 직무를 경험했던 이력, 관련 인턴 경험을 내세웠고, 김 씨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김 씨 역시 블라인드 채용임에도 자신의 학력 등 스펙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김 씨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반쪽짜리 '블라인드 채용'…"스펙 포기할 수 없어"

김 씨가 출신학교를 언급했던 게 당락을 좌우했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김 씨 외에도 많은 지원자가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 자신의 출신 학교나 전(前) 직장을 언급하며 스펙을 드러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서류에 기재하지 않더라도 30분에서 1시간 남짓 진행되는 기업 입사 면접에서 '완벽한' 블라인드 채용이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2014년부터 '블라인드' 면접 방식인 '드림 스테이지'를 진행하고 있다. 직무 연관성을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1차부터 3차까지 면접을 진행한다. 면접관들에게는 지원자의 출신학교, 전공, 나이 같은 개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드림 스테이지'에선 서류전형 점수 및 1차 면접 점수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게 신세계그룹 인사팀의 설명이다.

그러나 해당 채용 방식을 통해 신세계 계열사에 입사한 김모(30)씨는 "반쪽짜리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지적했다. 김 씨는 "1차 서류에서 학력사항, 나이, 스펙을 기재하는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며 "면접에서도 학교 이름을 밝혔다"고 했다. 면접 과정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하지만 1차 서류전형에서 학력·경력 같은 스펙을 통해 면접 대상자를 걸러낸다는 것이었다.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지만 정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취업준비생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병희 기자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지만 정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취업준비생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병희 기자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하는 기업 중에서 입사지원서에 스펙을 기재하도록 하는 곳은 신세계그룹 뿐만이 아니다. 4대 시중은행들은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일자리 창출'과 '블라인드 채용' 기조에 맞춰 채용 규모를 확대하고 역량 중심으로 지원자를 판단해 채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하반기 입사지원서에는 지원자의 학력 사항과 어학 점수 기재란이 남아 있었다.

하반기 공채 공고를 발표한 국민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기업은행 중 100%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하는 곳은 기업은행 뿐이었다.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사진·학교·성별·나이·거주지를, 신한은행은 학교·성별·나이·거주지를 서류전형 단계에서 기재하도록 했다.

면접 전형 준비물로 해당 지원자의 졸업증명서나 경력증명서를 요구하는 곳도 더러 있었다. 취준생들이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지원할 수 없는 이유다. 서울 모 사립여자대학교 취업지원 담당자는 "사실 기업들도 직무관련 능력을 보는 과정에서 100%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며 "학생들도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해도 회사가 원하는 인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관련 경험도 쌓으면서 스펙도 손 놓을 수 없어 답답하다는 반응이다"고 말했다.

◆"내 노력의 결과물은 어디에?"… '역차별' 논란 해소점은

공공부문에서 의무화된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찬반 논란도 뜨겁다. 지역간 정보 격차가 심각했던 상황에서 블라인드 채용으로 직무와 관련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 반응이 있는 반면,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에 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평가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지난 7월 6일부터 7일까지 회원 40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블라인드 채용에 관한 의견 조사'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0.9%는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에 공감했다. 찬반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71.9%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의 안착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도 여전했다. 인크루트가 지난 7월 31일 발표한 '블라인드 채용과 취업 사교육' 조사(취업준비생 361명 대상)에서 응답자의 76%는 블라인드 채용 여부와 상관없이 기존에 하던 취업 준비를 계속할 것이라고 답했다.

고용노동부의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에는 지원자의 학력, 출신지역, 가족관계, 키, 체중 등 신체조건을 기재하는 란이 없다. /고용노동부 제공
고용노동부의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에는 지원자의 학력, 출신지역, 가족관계, 키, 체중 등 신체조건을 기재하는 란이 없다. /고용노동부 제공

이런 우려의 시선 때문인지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 중인 민간기업들은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다각도로 고심하고 있다. L기업 관계자는 "전형 중 어떤 과정에서도 지원자의 스펙도 요구하지 않고 있으며, 기획안과 면접 만으로 '스펙태클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스펙태클(Spec-tackle)'은 무분별한 스펙 쌓기에 태클을 건다는 뜻을 지닌 신조어다.

이 관계자는 또 "블라인드 채용에서 한 번의 면접으로 채용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기 때문에 일단 인턴으로 채용해 또 한 번 순수하게 역량을 평가하는 과정을 거친다"며 "'스펙태클 오디션'으로 입사한 이들의 적응력도 뛰어나 회사 차원에서도 이 같은 방식의 채용을 늘리는 추세"라고 부연했다.

◆전문가 "구체적 가이드라인 마련돼야"

전문가들은 블라인드 채용이 확대되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박한준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 '공공기관 채용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고'에서 "공공기관이 적합한 인력을 선발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면 블라인드 채용이 사적 관계에 의존하거나 청탁 같은 부정에 노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위원은 그러면서 "블라인드 채용 제도의 기본 취지 뿐 아니라 발생 가능한 다양한 잠재적 결과를 예측해 정교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며 "각 공공기관이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적합한 인력을 선발할 수 있는 채용 역량을 확보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달 29일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해 "충분한 예고 없이 블라인드 채용 절차를 진행해 그간에 스펙을 쌓으려고 고생했던 사람들이 역차별 받는다고 하소연하고 있다"며 "피해가 없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ks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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