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북한은 왜 핵개발을 멈추지 않을까
입력: 2017.09.05 11:55 / 수정: 2017.09.05 12:47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3일 단행한 가운데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주목 받고 있다. /게티이미지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3일 단행한 가운데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주목 받고 있다. /게티이미지

[더팩트ㅣ박대웅 기자] 기어코 북한이 6차 핵실험을 3일 단행했다. 지난해 9월 9일 5차 핵실험 이후 약 1년 만이다. 더욱이 잇단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북한이 핵실험 카드까지 들고 나오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러시아와 북한의 혈맹 중국까지도 나서 북한의 6차 핵실험에 우려를 표명했다.

'이번에야 말로 북핵 문제를 뿌리 뽑을 기회'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흔히 말하는 '북핵 리스크'는 일상에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의 경험들이 북한의 핵개발 위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둔감하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보면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국제사회의 압박, 북한의 반발, 대화와 협정 체결, 약속 불이행에 따른 협정 무효의 역사가 반복됐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북한은 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감수하면서까지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것일까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나단 폴락 외교정책 선임 연구위원의 저서 'No Exit'를 토대로 짐작해 보자.

폴락 연구위원은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로 한국전쟁을 꼽았다. 폴락 연구위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에서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국에 공포를 느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국과 옛 소련을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봉착한 김일성은 스스로 경제와 안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김일성은 재래식 무기를 운용할 자원조차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핵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핵 개발에 몰두한다. /게티이미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핵 개발에 몰두한다. /게티이미지

실제로 북한은 1952년 우라늄 탐사와 핵 과학자 훈련을 위한 북한과학원을 설립했고, 1956년 전후 복구를 명분으로 소련에 이들 과학자를 파견하고 줄기차게 원자력 기술 이전을 요구했다. 덕분에 북한은 1963년 소련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고, 1967년부터 가동했다.

이후 북한은 남한에 미국의 전술핵이 배치된 1960년부터 1970년 사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핵무기는 자위용'이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 북한은 기만 전술을 활용해 핵무기 개발에 기술적 진보를 이뤘다. 1970년대 중국이 '핑퐁외교'로 미국과 손 잡는 것을 본 북한은 핵 확보를 위해 기만 전술을 펼친다. 북한은 일본과 서유럽에서 외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들여오고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그러는 한편 중동과 아프리카에 무기를 판매하고 39호실을 설치해 마약과 화폐 위조 등 온갖 불법 행위를 통해 외화를 끌어 모은다.

특히 북한은 핵 개발에 국제기구를 활용했다. 1974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다. 폴락 연구위원은 북한의 IAEA 가입은 원자로 기술 정보를 입수해 영변원자로를 건설하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북한은 1985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핵무기 개발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 뒤 경제와 기술협정을 체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북한은 IAEA와 NPT를 핵 개발 능력 강화를 위해 이용한 셈이다.

1990년대 들어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 북한의 핵은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등장한다. 1980년 말부터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됐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했고, 옛 소련이 1991년 해체됐다. 북한으로서는 심각한 체계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여기에 1990년 남한과 옛 소련의 수교,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체결되면서 북한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식 표현을 빌리자면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도의 경제적 궁핍기를 겪게 된다. 이 때부터 북한은 미국 등 서방국가에 원조를 요청하기 시작했고, 유효한 협상카드로 핵이 전면에 등장했다.

북한이 3일 6차 핵실험을 단행한 가운데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전방위적 제재를 논의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제공
북한이 3일 6차 핵실험을 단행한 가운데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전방위적 제재를 논의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제공

북한은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했다. 반면 자국핵은 철저한 폐쇄정책으로 보호에 나섰다. 북한은 1992년 핵 폐기물 보관이 의심된다는 사찰 결과를 토대로 특별사찰을 요구하는 IAEA의 목소리를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로 묵살했다. 이어 1993년 NPT를 탈퇴했고, IAEA도 탈퇴했다. 북한의 IAEA 탈퇴로 미국 등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와 함께 '북한 공격'도 언급했지만 오히려 북한은 '서울 불바다'와 정전 협정 무효화 발언으로 맞받아치며 벼랑 끝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북한 핵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전환점을 맞았다. 북한은 김일성 사후 모든 핵 시설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미국에서 경수로 2기와 중유를 제공받기로 한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하지만 2002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대북 강경 노선을 펴자 북한은 제네바합의 파기로 맞대응했다.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핵 무장 능력을 갖춰갔다.

북한 핵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의 핵 개발에 몰두하는 이유에 대한 진단이 있어야 한다. 흔히 북한이 핵개발에 몰두하는 이유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카드'라는 시각과 여차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위 수단'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으로 거론된다. 지난 박근혜·이명박 정부는 북한 핵을 단순한 협상카드로 봤고, 강력한 경제 제재 등 압박을 가하면 북한이 스스로 굴복하고 핵을 포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정권의 강경한 대북 정책에도 북한의 6차 핵실험은 막지 못했다. 6차 핵실험을 단행한 현재도 북한은 국제사회를 향해 ▲ 핵 보유국 지위 인정 ▲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1952년부터 계속되어 온 북핵 70여년 역사의 해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bdu@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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