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이새롬 기자 |
[더팩트 | 서민지 기자] " "캬, 안철수 전 대표 (기성) 정치인 다 됐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 대표가 당 대표 선출을 위한 8·27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한 지난 3일 여의도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안 전 대표에게 이 같은 평가는 누구보다 뼈 아픈 얘기다. 2012년 '새 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워 '안풍(安風)' 신드롬을 일으킨 것과 전혀 상반된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정치권에 입성 후 '새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일각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헌정 사상 최초로 다당제란 문을 연 공로 또한 일정 부분 인정받아 마땅한 것도 사실이다. 대선 전 국민의당 출입기자로 안 전 대표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대통령감으로 부족한 자질'이란 일부 평가에 대해 상당수 정치인들은 "아직도 정치를 잘 모른다"는 말로 답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정치 초년생으로서 '순수한(?) 이미지'는 안 전 대표의 대표적인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의 최측근은 "안 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때 '과연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속아서 놀라고, 또 속을 정도로 순수하다. 그래서 내가 '책은 그만 보고 사람을 좀 많이 만나라고 했다'고 조언했다"고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정치인들을 지근거리에서 오랬동안 봐온 기자 출신의 한 의원 역시 안 전 대표의 대선 패배 원인을 "너무 순수해서 탈이다. 정치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주위 평가는 비록 현실 정치에 물이 덜 들었을 망정, 그 순수함과 열정은 나름 매력적이란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19대 대선 당시 문준용 씨 특혜 의혹 제보 조작 사건과 관련해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이는 국민의당 천정배 전 공동대표, 김동철 원내대표, 박주선 비상대책위원,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 박지원 전 대표(왼쪽부터). /이새롬 기자 |
그런 안 전 대표가 이제 '노련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7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문준용 취업 특혜 제보조작 사건'과 관련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사과한 지 22일 만에 당의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책임은 전적으로 후보였던 제게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치인으로 살아온 지난 5년 동안의 시간을 뿌리까지 다시 돌아보겠다"고 다짐한 지는 사흘 만이다.
'시기'는 제쳐두고, 안 전 대표가 내세운 명분 역시 기성 정치인들을 답습했다. 그는 "결코 제가 살고자함이 아니다. 당 자체가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다"면서 선당후사의 마음으로 대선보다는 '당의 생존'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국민의당이 5%의 지지율로 존폐위기를 겪는 결정적 이유는 '제보조작 사건'인데 말이다. 안 전 대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대선후보였던 그는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출마를 선언한 정동영 의원과 천정배 전 대표가 아닌, 무리해서라도 본인이 당대표로 나서야 하는 또 다른 '명분'도 제시했다. '극좌'도 '극우'도 아닌 '극중'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좌우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정당을 만들려면 스스로 '당의 얼굴'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지난달 1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문준용 씨 취업특혜 의혹 ‘제보 조작’ 논란 관련에 대해 고개를 숙이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위). 22일 만인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고개를 숙인 안 전 대표(아래). /이새롬·문병희 기자 |
'7월 12일, 7월 31일, 8월 3일', 세 차례 안 전 대표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글귀가 생각났다. 쿤데라가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해석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매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없이 닥치는 모든 사건을 겪는데 이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단 한 번'뿐이기에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이라는 단어가 왜 '불신의 아이콘'이 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정치적 득세와 실리에 따라 국민에게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 듯' 뻔뻔하게 입장을 바꿔온 정치인들을 숱하게 봐 왔다. '책임'을 내세워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1~2년 두문불출하다 선거철이 되면 "국민이 불러서 왔다"며 슬그머니 복귀한 정치인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래서 상당수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뭐"라며 정치인을 '무의미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자타공인 '정치 9단'이라 불리는 한 의원은 정치인의 '가벼운 행실'에 대해 "정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국민의당 일부 인사들은 안 전 대표에게 후보등록일인 오는 10일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 입장을 선회할 것을 권하기도 한다.
결국 국민의당의 향배는 안 전 대표가 앞으로 보여줄 행보의 '무게감'에 달렸다. 출마를 선언한 이상 이젠 스스로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당 혁신에 앞서 먼저 제 자신을 바꾸겠다. 조국을 구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얼어붙은 두만강 건넌 안중근 의사 심정으로, 저 안철수 당 살리고 대한민국 정치 살리는 길로 전진하겠다"는 안 전 대표의 다짐이 더 이상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