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박 대통령은 '이방인', 국민은 부조리에 대항 중
입력: 2016.12.20 05:00 / 수정: 2016.12.20 16:39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와 관련해 제출한 답변서에서 국정 농단의 주역 최순실과의 관계를 키친 캐비닛으로 표현하고, 국정 농단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검찰의 공모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4일 2017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 당시 박 대통령. /배정한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와 관련해 제출한 답변서에서 국정 농단의 주역 최순실과의 관계를 '키친 캐비닛'으로 표현하고, 국정 농단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검찰의 공모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4일 2017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 당시 박 대통령. /배정한 기자

[더팩트 ㅣ 이철영 기자]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알베르 카뮈의 책 '이방인' 중 한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두 달여째 현재진행형으로 국민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 있다. 수많은 논란 속에 결정된 것이 있다면 박 대통령이 탄핵당했다는 것이다. 카뮈의 책 '이방인' 중 한 문단을 지금 상황에 비춰 단순하게 읽어 보자.

박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답변서나 그동안 최 씨와 관련해 보였던 태도와 어쩌면 이렇게 일맥상통한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박 대통령은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최 씨가 사익을 추구했더라도 피청구인(대통령)은 개인적 이득을 취한 바 없고 최 씨의 사익추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최 씨의 국정 농단에 관해 "전혀 몰랐다"고 부인한 것이다.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234표로 가결했다. 사진은 지난 3일 국회 본회의장. /배정한 기자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234표로 가결했다. 사진은 지난 3일 국회 본회의장. /배정한 기자

검찰의 공소장에도 박 대통령이 최 씨 등과 공모했다는 것이 적시됐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박 대통령의 태도는 거리로 나온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처사인 것을 넘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라는 항변이다. 박 대통령의 태도는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는 식이다.

또, 박 대통령은 공무상비밀누설 혐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키친 캐비닛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항변했다. 박 대통령은 "피청구인 지시에 따라 최 씨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유출 경로를 알지 못한다"며 문서유출이 정호성(47ㆍ구속기소)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과 최 씨 사이에서 벌어진 일로 치부했다.

아울러 최 씨가 연설문을 본 것에 대해선 "직업 관료나 언론인 기준으로 작성된 문구들을 국민이 보다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부 표현에 관해 주변의 의견을 청취한 것"이라며 '키친 캐비닛'이라고 했다. 미국 정가에서 사용되는 키친 캐비닛은 대통령에게 식사 자리 초대를 받을 정도로 가까운 지인을 뜻한다.

박 대통령이 공무상비밀누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라고 따지는 듯한 모습이다. 박 대통령의 논리에 빗대어 보자면 '나는 연설문을 주지 않았지만, 최 씨가 키친 캐비닛이어서 의견은 청취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로 해석할 수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1000만 명에 가까운 국민이 차가운 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박 대통령이나 청와대 그리고 새누리당도 광장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정작 탄핵 후 박 대통령이나 청와대 그리고 새누리당 친박계가 보인 태도는 그간 보였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돌변이다.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의 관계나 공모를 부정하면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었다. /이효균 기자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의 관계나 공모를 부정하면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었다. /이효균 기자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게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을 가진 수많은 사람도 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이글의 첫 문장에서 인용한 글의 뒷부분이다. 박 대통령만이 특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특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 대통령의 퇴진을 한 달이 넘도록 목 놓아 외치는 국민은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시지프'일지도 모른다.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시지프가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시지프는 이를 계속 반복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용의 노동이다.

어쩌면 지금 거리로 나온 국민은 박 대통령의 이런 변명과 싸우는 시지프의 형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4년 전 선택으로 인한 형벌을 말이다. 무용의 노동을 반복하는 불행한 시간을 보내는 시지프에 관해 카뮈는 그의 책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카뮈가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한 것은 부조리(부조리 인간: l'homme absurde(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한 상황을 숙명적인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즉, 카뮈가 시지프를 통해 본 것은 '체념'이 아니라 부조리한 조건을 피하지 않는 '저항 정신'이었다. 따라서 지금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시지프의 형벌을 받는 광장의 국민은 카뮈의 말처럼 누구보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이 국민의 일반 상식을 벗어난 논리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국민의 저항 정신은 더욱더 거세질 것을 왜, 모를까.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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