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색다른 인문학] 국민은 일류, 대통령은 오류다
입력: 2016.12.05 10:12 / 수정: 2016.12.05 10:12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탄핵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 야3당은 지난 3일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 의안과에 제출하고 오는 9일 본회의에서 표결한다. 탄핵 전 박 대통령이 자신의 퇴진과 관련한 입장을 다시 밝힐지 귀추가 주목된다. /배정한 기자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탄핵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 야3당은 지난 3일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 의안과에 제출하고 오는 9일 본회의에서 표결한다. 탄핵 전 박 대통령이 자신의 퇴진과 관련한 입장을 다시 밝힐지 귀추가 주목된다. /배정한 기자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21년 전이다. 지금은 병석에 누운 이건희 회장이 원기 왕성할 때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들과 만났다. 중국 술이 독했을까, 과했을까. 호언(豪言)을 한다. "한국의 정치는 4류, 행정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다."

당시 이 회장을 수행한 엄모 홍보이사는 깜짝 놀랐다. 그 역시 중앙일간지에서 데스크까지 역임했던 터라 발언의 심각성을 바로 알아차렸다. 즉시 "오프 더 레코드"를 외쳤지만, 늦었다. 사전(事前)이 아니라 사후(事後) '오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한 조간이 기사를 보냈고, 그 후폭풍은 거셌다.

이후는 알려진 대로다. 대통령 YS는 크게 화를 냈고, 삼성은 조마조마 납작 엎드렸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말은 계속 회자됐다. 나름 정확한 진단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어떨까. 4류 정치는 좀 나아졌을까. 기업은 여전히 2류쯤은 될까. 냉정하게 말한다면, 순위가 별 의미가 있을까 싶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민낯은 기업이나 관료나 정치나 모두 도긴개긴이다. 차이라고 해 봐야 오십보백보쯤일까.

그래서 숫자 대신 한자로 붙여봤다. "기업은 이(利)류, 관료는 삼(參)류, 정치는 사(邪)류다." 기업은 말 그대로 이익만 생긴다면 무엇이든 한다. 손해 볼 일은 절대로 안 한다. 삼성이 최순실에 거액을 건넸지만, 그 백배 이상 챙겼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이 손을 들어주면서 이재용 체제가 굳건해진 것이다.

재벌 총수 9명이 6일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재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증인으로 출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더팩트 DB
재벌 총수 9명이 6일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재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증인으로 출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더팩트 DB

롯데는 면세점 허가를 놓고 K스포츠에 돈을 냈고, 부영은 세무조사 무마를 넌지시 요구했다. 기업은 힘없는 약자 코스프레를 하지만, 사실상 '푼돈'을 들여 거대한 이익을 남길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기업은 이(利)류다.

정치와 기업 사이에는 심부름꾼이 필요하다. 그것이 관료이다. 적절히 중간에 개입해 자신의 몫을 챙긴다. 그것이 자리보전이든, 자리 제공의 이권이든. 김종 전 차관이나 안종범 전 수석이 심부름꾼을 열심히 한 것은 공직(公職)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엽관매직(獵官賣職)의 당사자들이다.

일반인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어지간한 공기업의 대표나 회장 자리도 정책조정수석이 좌지우지한다. 상장회사인 포스코나 KT의 회장도 이사회에서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청와대에서 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포스코의 광고대행사 포레카를 삼키려는 것도, KT의 광고 담당 전무에 사람을 심어 광고를 싹쓸이하는 것도, 그 힘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다. 삼(參)에는 셋이란 뜻도 있지만, 참여하고 관계한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관료는 삼(參)류다.

정치는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해 있다. 권력을 놓치면 금단증상을 겪는다.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지 권력의 줄을 잡고, 권력의 단맛을 맛보려 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치인에게 '정의'는 '끈적끈적한 정리'와 '뒷골목 의리'를 뜻한다.

최순실·안종범·정호성 등은 박 대통령과 함께 기업으로부터 강제로 기금을 모금한 것은 물론 각종 인사에도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구속기소됐다. /더팩트DB
최순실·안종범·정호성 등은 박 대통령과 함께 기업으로부터 강제로 기금을 모금한 것은 물론 각종 인사에도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구속기소됐다. /더팩트DB

표를 구걸한다고 해서 '동냥 벼슬'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굽실대고 4년~5년을 군림하지 않는가. 그러니 국회의원은 "내가 선거구민을 배반할 수 있지만, 선거구민은 나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때 우스개가 있었다. 국회의원들에게 "당신이 당선되면 통일이 늦어지고, 당신이 낙선하면 곧바로 통일이 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란 질문에 답은 모두가 똑같았다고 한다. "내가 당선돼 통일을 앞당기겠다."

이번 촛불 혁명의 와중에서도 친박이다 비박이다 제 살 길 찾아 주판알 튕기기에 여념이 없다. 어제의 동지도 오늘의 적이다. 배신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늘 그래왔기에 부끄러움도 못 느낀다. 대통령이 국민에 사실상 탄핵됐는데도, 친박 그 누구도 현 상황에 책임지고 사퇴하는 이가 없다. 그러면서 정국을 호도한다. 이들은 어려운 정(正)의 길보다 양심만 조금 굽히면 되는 사(邪)의 길을 서슴없이 택한다. 정치가 사(邪)류인 이유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과 관료와 정치를 이야기했지만, 작금에 돌이켜보면 두 가지가 빠졌다. 바로 대통령과 국민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5년 임기제 국민의 심부름꾼인데도, 오히려 군림하려 한다. 마치 왕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런 착각은 기업-관료-정치가 부채질한다. 그럼에도 스스로 명철하면 나름대로 역사에 기여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을 늘 그렇지 못하다.

지난 3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오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여부에 따라 촛불집회 규모나 성격이 달라질 전망이다. /이효균 기자
지난 3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오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여부에 따라 촛불집회 규모나 성격이 달라질 전망이다. /이효균 기자

뽑고 나면 실망하기 일쑤다. 대부분 그랬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뽑는 구조에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 나물에 그 밥을 두고 국민들이 얼마나 '손가락'을 부러뜨렸던가. 그래서 대통령은 오(誤)류이다. 탄핵을 앞둔 대통령은 스스로 오류(誤謬)인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汚)류도 뜻이 통한다.

마지막으로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당연히 일(一)류이다. 왕정시대에는 나라의 주인이 왕이므로 군왕무치(君王無恥)이다. 민주공화정에서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므로 당연히 국민무치(國民無恥)이다. 보라, 지난 주말(3일) 광화문 광장에 160만 촛불이 모였지만, 전국에 232만 촛불이 모였지만, 불상사 하나 없이 끝났다.

지금 우리는 촛불 혁명, 위대한 시민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 4.19에서 촉발되고, 6월에 굽이치다, 지금 12월에 변곡점을 맞은 민주주의의 현대사를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권의 입맛대로 쓰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시민의 손으로 쓰는 촛불판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관료가, 정치가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바로 세우고 있는 것이다. 뒤로 돌아간 대한민국호(號)의 침로를 미래 쪽으로 고쳐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시민혁명은 세계사에 없었다. 세계의 눈은 한국으로 쏠리고 있다. 국정 농단을 비웃었던 그들이 '시민의 힘'에 놀라고 있다. 다시금 표현하면 시민(국민)은 일(一)류, 기업은 이(利)류, 관료는 삼(參)류, 정치는 사(邪)류, 대통령은 오(誤)류이다.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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