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26일 국회 새누리당대표접견실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앞서 이 대표는 정 의장이 사퇴할 때까지 단식 농성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국회=이새롬 기자 |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법정으로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50대 중반의 평범한 남성이 법정에 섰다. 그는 왜 법정에 서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체포된 이 중년 남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뿐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 남성을 향해 세계는 왜 주목했을까.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를 고치는 일을 하던 이 평범한 남성의 원래 직업은 군인이었으며, 국적은 독일이었다.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의 이 남성의 본명은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이 설치된 기차를 고안해 냈던 인물이다.
그는 "저는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제가 제작한 '열차'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그 기차로 인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사망했지만, 아이히만에게는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아이히만 자신이 만든 기차 안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하며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26일부터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1시간씩 돌아가며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김무성 전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윤유철 전 원내대표(왼쪽부터). |
법정에서 아이히만을 지켜본 독일 태생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술하고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물론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아렌트는 법정에선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당신의 죄는 '사유(思惟, 생각하고 궁리함)의 불능성', 그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함이다"고 말했다.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때문이다. 20대 국정감사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전면 보이콧을 하는 지금 '사유의 불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여당의 보이콧은 지난 24일 새벽 정세균 국회의장이 차수 변경을 선언하고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무기명 투표를 상정하면서 시작했다.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을 맞은 새누리당으로서는 김 장관 해임안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편 작전이 "국무위원들에게 김밥이라도 먹을 시간이라도 줘야 할 것 아니냐"는 이른바 정진석 원내대표의 '필리밥스터'다. 하지만 여당의 이런 시간 끌기는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새누리당도 이 작전이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단독으로 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헌정사상 처음이다. 박 대통령의 반응에 여당은 즉각 반응했다. 여당은 '국정감사 보이콧'과 정 의장 사퇴를 촉구하는 이정현 대표의 '단식'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잔 24일 김재수 농림부 장관 해임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과 관련 장차관 워크숍에서 "비상시국에 형식적 요건도 갖추지 않은 농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이 대표의 단식과 새누리당의 보이콧 등의 반응을 댓글과 게시물로 살펴보았다. 아무렴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단식을 비난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그러나 누리꾼들의 반응은 그 반대로 "끝까지 단식했으면 좋겠다" "라이브로 방송해야 한다" 등 조롱하는 듯한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반응도 참 드물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한 '사유의 불능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일정 부분 박 대통령의 국정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집권 여당이라고 대통령의 정책에 조건 없는 지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아렌트의 말처럼 '사유의 불능성'에 빠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재 새누리당이 보이는 모습은 많은 국민으로부터 이해를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얼마 전 한 잡지에서 본 글을 메모해두었는데 그 글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 올바른 정치 판단의 궁극적인 책임은 시민에게 있다. 시민은 당에 속하지 않고 지역적 이해관계에 결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가의 존재 이유는 시민의 대표라는 데 있다. 시민의 판단에 의해서 정치 행위 즉, 정책 결정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특성을 갖게 될 때 정치는 순기능을 하게 된다'고 충고했다.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 국가다. 국회의원 300명은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이번 김 장관 해임안도 야당 단독 처리였지만, 대의민주주의를 통한 시민의 결정이다. 그런데도 이를 부정하고 자신을 따르는 세력의 말만 듣겠다는 것은 편 가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여당의 잘못을 지적할 때 아이히만의 주장처럼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한 사유의 불능성을 든다면 이는 '여당심기문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