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색다른 인문학] 우병우의 버티기와 '멍청이' 고스톱
입력: 2016.08.22 10:45 / 수정: 2016.08.22 10:45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지난 18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 직권남용과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검찰은 22일부터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더팩트DB, 서울신문 제공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지난 18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 직권남용과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검찰은 22일부터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더팩트DB, 서울신문 제공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한때 고스톱은 전 국민의 오락이었다. 시쳇말로 "셋이 모이면 고스톱"이었다. 이따금 도박으로 흘러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심심풀이'까지 제지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변변한 여가 시설도 없었다. 직장인에겐 무엇보다 저녁이 없었다. 사막화된 도시에서 피폐한 이들에게 고스톱은 잠시나마 목을 축일 오아시스였다. 동시에 닫힌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열린 소통 공간이었다.

가족이나 이웃과 만나면 정담(情談)이었고, 친구나 동료와 어울리면 수담(手談)이었다. 물론 끼리끼리 사담(私談)도 있었겠고, 더러는 사업상 정담(政談)도 적지 않았다. 그랬던 고스톱이 언제부터인지 시들해졌다.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게임들이 대체재로 등장했다. 샐러리맨의 일상도 여가를 즐기기에 빠듯했다. 게다가 핵가족화로 서너 명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필자는 끝내 이뤄낸 민주화의 영향으로 본다. 이는 평소 지면을 통해 주장해 온 바이기도 하다.

거듭 말하지만, 고스톱은 본디 민중성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추구하는 게임이다. 생각해보자. 고스톱이 생겨나기 전 '민화투'는 광(光)을 우두머리로 열 끗과 띠와 피의 '신분제' 놀음이었다. 소위 '흑싸리 껍데기'는 '약'에도 쓰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다.

그런데 고스톱이란 새로운 형식의 게임이 등장하면서 민화투 판에 혁명이 일어난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똑똑한 '광'이 아니라 장삼이사(張三李四) '피'다. 그 원관념은 바로 민중이다. 서민이자 샐러리맨이요, 소규모 자영업자요, 농어민들이다.

정치권은 선거철 지지를 호소하며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지난 4월 13일 제20대 총선 투표 현장./더팩트DB
정치권은 선거철 지지를 호소하며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지난 4월 13일 제20대 총선 투표 현장./더팩트DB

선거철에 반짝 대접하곤 까맣게 잊어버렸던 이들이 모여 '3점'을 내는 것이다. 게다가 피를 천대하면 소위 '피박'까지 쓴다. 그러니 고스톱 판에선 '피'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되고, 부지불식간에 민중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됐다는 것이다.

'색깔론'에도 불구하고 청단 홍단 흑단을 인정하고, 과거 '민화투' 시절에 잘 나갔던 광들도 셋이 모이면 '3점'을 줬다. 다만 신분제 시절 트럼프의 '에이스+조커'쯤이었던 '비 광'은 핸디캡을 주었다. 그래도 광이 넉 장이면 4점을 인정했다.

이른바 지배계급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아니라 화해를 통한 민주화였다. 결국, 고스톱은 정치적 민주화를 앞당기는 정서적 자양분이 됐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본디의 기능을 다하고 시들어갔다고 본다.

이후에도 여러 장의 '다이아몬드'로 판의 규모를 키우고 '동물 고스톱'이라는 변종이 나왔지만, 이런 한탕주의는 서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부익부 빈익빈'의 승자독식 구조에서 서민들의 기회는 없는 것이다.

사실 고스톱에서 '신의 한 수'는 '열 끗'의 처리다. 모두 9장인 열 끗은 7장이 모여야 3점이 된다. 확률로 따지면 광이나 띠나 피보다 매우 어렵다. 따라서 '열 끗'으로 점수를 내려는 것은 멍청이 짓에 가깝다. 고스톱 규칙을 창안한 선구자들이 왜 그랬을까.

아마 '지주보다 미운 게 마름'이란 정서 때문이 아닐까. 소작인을 관리하는 마름의 위세가 지주보다 더한 것이다. 지주도 짐짓 외면하거나 더러는 적극적으로 밀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가 기승을 부렸던 것이다. 이들에게 지주는 충성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에 불과했다. 시시콜콜 전횡을 일삼으며 암암리에 엄청나게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야 정치권에서 우병우(오른쪽) 청와대 민정수석비사관의 사퇴와 경질 요구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더팩트DB, 서울신문
여야 정치권에서 우병우(오른쪽) 청와대 민정수석비사관의 사퇴와 경질 요구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더팩트DB, 서울신문

마름의 특징은 '본말전도(本末顚倒)'와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마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면 "주인 흔들기"로 규정해 버린다. 그리곤 주동자를 색출하겠다고 한다. '가르고 길들이기' 수법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행태에 곱지 않은 말이라도 던지면 "어디서 행패, 누구에게 반말이냐"며 되치기에 나선다.

마름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설혹 주인이 내칠 것 같으면 감춘 이빨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것이 '마름 본색'이다. 이런 속성이 '열 끗'을 '멍청이'로 만든 배경이자 심모원려(深謀遠慮)일 것이다.

이 같은 뿌리를 지닌 '민중 고스톱'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위기에 봉착하면 기민하게 대처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 등장으로 민주화가 안개에 싸이자 '전두환 고스톱'으로 경각심을 고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비록 소극적이지만, 잡초 같은 끈질김으로 말이다.

지금 혹자는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걱정한다. 공복(公僕)이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만 섬긴다고도 한다. '열 끗(심복)'들이 문제라고도 하며, 대통령도 '열 끗'만 애지중지하는 것 같다고도 한다. 어쩌면 최근의 정치적 복고풍 흐름에 고스톱이 다시 각광받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이름은 '멍청이 고스톱'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ps.tea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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