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임~행진곡' 제창 거부와 '협치'의 한계
입력: 2016.05.17 05:00 / 수정: 2016.05.17 07:58
박근혜(가운데) 대통령이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3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회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근혜(가운데) 대통령이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3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회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중략)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집회 현장을 지날 때면 들려오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다. 이 노래는 민중가요로 노동운동 혹은 시민사회운동 장소에서 늘 불리는 노래다. 시위의 성격이 정부와 관련된 곳이라면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상징성이 높다.

이 노래는 1980년 5월 27일 5·18 민주화운동 중 전라남도청을 점거하다가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현장에서 '들불 야학'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것이다.

아름다울 것 같은 이 노래는 매해 5월이면 정치권의 이념 논쟁 중심에 선다. 2009년 이후 5·18민주화운동 정부 행사에서는 합창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이날만 다가오면 보수와 진보 진영은 노래의 제창을 놓고 설왕설래한다.

이런 이유로 여야 정치권은 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인 올해의 '제창' 결정으로 협치의 시발점을 만들자고 했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대표단 회동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됐다.

일부 보수단체는 5·18민주항쟁을 여전히 남한 내 종북 세력이 북한의 지령 때문에 일으킨 소요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재판부는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고 결정했다. 5·18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이 시위대를 폭행하고 있는 모습.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일부 보수단체는 5·18민주항쟁을 여전히 남한 내 종북 세력이 북한의 지령 때문에 일으킨 소요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재판부는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고 결정했다. 5·18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이 시위대를 폭행하고 있는 모습.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이날 청와대는 회동 후 브리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제창을 허용해달라는 것을 두 야당에서 건의했고, 박 대통령은 국론 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아보라고 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제창될 것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16일 국가보훈처는 "지난 3일간 논의를 통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 포함해 합창단이 합창하고, 부르고 싶은 분들은 따라 부르고, 부르고 싶지 않은 분들은 부르지 않는 방식이 논란을 최소화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야당의 제창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1996년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5·18 묘지로 승격됐다. 5·18민주항쟁 전남 도청 앞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민주화운동은 1996년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5·18 묘지로 승격됐다. 5·18민주항쟁 전남 도청 앞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정치권은 보훈처의 이런 결정에 입을 모아 비판했다.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6주기 당일 이 정권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국정운영의 큰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경고했고,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이것은 소통과 협치를 깨버리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국론분열을 막는 차원에서 지혜롭게 좋은 방향으로 검토해보라는 지시가 있었던 만큼 전향적으로 검토해줬으면 좋겠다"고 재고를 요청했다.

보훈처의 이런 발표에 두 야당은 20대 국회에서 기념곡 지정 관련 법안 개정 및 박승춘 보훈처장의 해임촉구건의안 공동발의를 제안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제창에 뜻을 모으지 못함으로써 시작하기도 전에 협치가 어긋나고 만 것이다.

보훈처나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으로 이어가고 있는 데는 보이지 않게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논리가 있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6일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결정에 국방부의  5·18 민주항쟁과 관련한 군의 입장을 올렸다. /김광진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6일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결정에 국방부의 5·18 민주항쟁과 관련한 군의 입장을 올렸다. /김광진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극히 일부라 믿고 싶지만, 일부 보수단체는 여전히 1980년 5·18 민주항쟁은 남한 내 종북 세력이 북한의 지령 때문에 일으킨 소요 사태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불가하다고 본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36년이 지났지만, 이 논란은 여전하다. 역사적으로 이미 '민주화항쟁'으로 그리고 2011년 5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음에도 말이다.

16년 만의 여소야대 그리고 3당 체제로 개원하는 20대 국회를 앞두고 정치권은 하루가 멀다고 '협치'를 외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첫 협치의 시험대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가로 틀어지며 험로를 예고하게 됐다.

36년 전 윤상현은 계엄군 진입이 임박한 순간 총을 달라는 고등학생들에게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여전히 '빨갱이' '종북'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의 증인으로 이번 정부의 결정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기념곡이 없는 정부 행사, 합창은 가능하지만, 제창은 불가능한 현실. 36년 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그들에 대한 2016년의 처우는 과연 합당한가.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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