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옥시' 파문, 뒷북 요란한 정부-정치권 '유감'
입력: 2016.05.03 05:00 / 수정: 2016.05.02 22:32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한국법인 대표가 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피해자와 마주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한국법인 대표가 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피해자와 마주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며칠 전 아내와 아이가 먹는 한 간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내용의 요지는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이가 먹는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글이 올라와 엄마들이 갑론을박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몹시 걱정스럽게 "계속 먹여도 되겠지?"라고 물었고,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아"라고 답했다.

그래도 아내는 걱정스러웠는지 해당 회사 관계자에게 문의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해당 회사 관계자에게 전화해 문의했다. 돌아온 답은 "경쟁사 또는 일부 업체의 마케팅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엄마들은 아이에 관한 것에는 항상 민감하다. 기자 역시 아내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괜한 걱정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다 문득 '가습기 살균제' 논란이 떠올랐다.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역시,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 소비자들은 아이를 위해 또는 가족을 위해 제품을 사용했다. 정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근 정부와 정치권은 앞다퉈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혹 제기 후 146명이 사망하고 유해성이 사실로 드러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말그대로 '뒷북'이다.

가습기 살균제 첫 피해자는 2002년에 나왔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007년 대학병원 의료진이 원인 미상의 폐 질환이 가습기 살균제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제기하면서부터다.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석하고 있다. /박지혜 기자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석하고 있다. /박지혜 기자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2011년 임산부 4명이 숨지자 역학 조사에 나섰다. 복지부는 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폐 질환의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지만, 이번엔 검찰이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 사망자는 늘어났고 검찰은 복지부의 발표가 나온 지 5년 만에 수사를 시작했다.

정부와 사법기관이 늑장 대응을 하는 동안 정치권은 무엇을 했을까. 여당인 새누리당은 '기업과 소비자의 문제'로 선을 그은 채 손을 놓고 있었다. 야당도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쟁으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여야 모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박근혜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논란이 확산하자 정부와 정치권은 '특별법 제정' 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이 역시 뒷북이다. 2013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4개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가 열린 가운데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한 상임위원회 앞에 법안 서류들이 쌓여 있다. /배정한 기자
19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가 열린 가운데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한 상임위원회 앞에 법안 서류들이 쌓여 있다. /배정한 기자

국회에 계류된 4개 법안은 장하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가습기 살균제의 흡입 독성 화학물질에 의한 피해구제법', 같은 당 홍영표 의원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법', 같은 당 이언주 의원의 '생활용품 안전 관리 및 피해 구제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화학물질 및 화학물질이 함유된 제품 등에 의한 피해 구제법'이다.

이미 발의된 법안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운운하는 꼴을 보는 국민 심정은 '한심하다'는 말 외에는 없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나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 존재에 대해 비난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해 2일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한국법인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고 공식으로 사과했다. 때 늦은 사과다.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도 때 늦은 대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옥시레킷벤키저가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첫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 최승운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문병희·남윤호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옥시레킷벤키저가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첫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 최승운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문병희·남윤호 기자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나 국회가 개판이라고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안 된다." 그는 또 "국민은 정치가 곧 자신의 삶에 밀접하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불행해진다. 그러니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국민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우린 또다시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사태를 겪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 뒤에야 뒷수습하는 정치권의 모습만 보게 된다. 항상 뒷북만 치는 정부와 정치권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그 날을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만 한다.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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