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포커스] '필리버스터 192시간 25분' 여야, 승자없는 '마이웨이'
입력: 2016.03.02 20:11 / 수정: 2016.03.02 23:17

지난달 23일 필리버스터를 시작한 더불어민주당은 2일 중단을 결정했다. 최근 테러방지법 본회의 의결을 촉구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피켓 시위(왼쪽)와 이를 반대하는 이종걸 원내대표의 피켓 시위./더팩트DB
지난달 23일 필리버스터를 시작한 더불어민주당은 2일 중단을 결정했다. 최근 테러방지법 본회의 의결을 촉구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피켓 시위(왼쪽)와 이를 반대하는 이종걸 원내대표의 피켓 시위./더팩트DB

[더팩트 | 오경희 기자] 승자는 없었다. 8박 9일만에 끝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합법적 의사 방해)는 무엇을 남겼나.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새누리당발 테러방지법 본회의 의결을 저지하고자 47년 만에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다. 같은 날 오후 7시께 김광진 의원을 시작으로 2일까지 38명의 의원들이 눈물과 탄식으로 법안 반대를 호소하며 장시간 발언대에 섰다. 이 기간 은수미(24일, 10시간18분)·정청래(27일, 11시간39분) 등 개인 의원마다 필리버스터 기록을 경신했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국내 개인 최장 기록(12시간31분)을 세웠다. 상당수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도 뒤따랐다.

하지만 더민주는 9일 만에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했다. 4·13 총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및 비대위는 필리버스터 장기화에 따른 총선 역풍 등 부작용을 우려했고, 지난달 29일과 1일 두 차례 의원총회에서 격렬한 논의 끝에 2일 이종걸 원내대표의 '마지막 등판'을 결정했다. 필리버스터를 제안했던 이 원내대표는 38번째 토론자로 나와 국민들에게 테러방지법 독소조항등을 열거하며 '미완성'의 무제한토론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테러방지법의 독소 조항 수정·삭제를 요구한 더민주의 협상 제안을 거절하며 버틴 새누리당은 원하던 결실을 손에 쥐게 됐다. 반면 필리버스터로 국면 전환을 시도한 더민주는 이슈 몰이에 성공했지만, 총선(일정)벽을 넘지 못하고 야당으로서 현실적 한계를 드러냈다.

◆ 밀어붙인 與, 겉으론 웃지만 속앓이?

여당인 새누리당은 겉으론 승리를 거뒀다. 테러방지법 원안 조항 고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배정한 기자
여당인 새누리당은 겉으론 승리를 거뒀다. 테러방지법 원안 조항 고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배정한 기자

여당인 새누리당은 겉으론 승리를 거뒀다. 테러방지법 원안 조항 고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새누리당은 이철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과 서상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가 사이버테러 방지 등에 관한 법률안'을 여당 안으로 제출했다. 이 법안이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는 국가정보원이 테러위험 인물에 대한 정보 수집을 쉽도록 하는 내용 때문이다.

야권은 테러방지법에 담긴 독소 조항을 삭제하거나 수정을 촉구하며 협상을 요청했고, 여당은 거부했다.

야권이 제기한 독소 조항은 ▲국정원장 소속 테러통합대응센터 설치 ▲테러 기도 지원자로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의 정보수집 허가 ▲테러 선전·선동 글, 그림, 상징적 표현 등 인터넷 유포 시 긴급 삭제 허가 등이다.

김용남(왼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대해 관련 없는 발언이라며 항의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김용남(왼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대해 관련 없는 발언이라며 항의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하지만 국회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은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로 해당 회기에서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있어도 다음 회기가 열리면 무조건 표결 절차에 들어간다. 또한 회기 내에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면 국회의장은 토론 종결을 선포하고 해당 안건을 지체 없이 표결 처리해야 한다.

이 원내대표의 토론 종료 직후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소집했으며, 국회는 잠시 정회 뒤 본회의를 속개하고 테러방지법을 표결에 부쳤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 의원들의 퇴장 속에 재석 의원 157명 중 156명 찬성·반대 1명으로 원안 그대로 국회를 통과했다.

일각에선 '절반의 승리'란 평가도 나온다. 집권 여당으로서 청와대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다는 점과 일부 의원들은 필리버스터에 나선 더민주 의원들을 강경한 태도로 대응해 도마에 올랐다.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은 은수미 더민주 의원에게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는 공격성 발언을 했다가 논란에 휩싸였고,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더민주 소속 이석현 국회부의장과의 설전 끝에 '퇴장 경고'를 받기도 했다.

◆ 사면초가 野, 총선에 발목…"죽을 죄 졌다"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들면서 더민주는 퇴로가 없었고, 필리버스터가 마지막 저항책이었다./임영무 기자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들면서 더민주는 퇴로가 없었고, 필리버스터가 마지막 저항책이었다./임영무 기자

더민주로선 사면초가였다.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들면서 퇴로가 없었고, 필리버스터가 마지막 저항책이었다.

47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는 기대 이상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으면서 순항하는 듯했다. 무제한토론에 나선 다수의 의원은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 최상위에 오르며 이른바 '필리버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4·13 총선을 코앞에 두고 선거구 획정을 포함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및 민생법안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김종인 대표는 3·1절 전 필리버스터 종료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더민주는 지난달 29일 저녁 의원총회를 열어 이종걸 원내대표에게 비대위와 논의해 필리버스터를 계속할지 여부를 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고, 이 원내대표는 김종인 대표 등 비대위와의 심야 회의 끝에 1일 오전 9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필리버스터 중단을 선언하기로 했지만 돌연 연기했다.

더민주 내에서 필리버스터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경파' 의원들의 목소리가 컸고, 정의당 및 기존 필리버스터 신청 의원들의 발언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결국 더민주는 1일 오후 7시 10분께 의원총회를 한 차례 더 열고, 3시간여의 격론 끝에 2일 필리버스터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발언대에 선 이종걸 원내대표는 그동안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의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난다. 정말 잘못했다. 저 이종걸, 그리고 한 두 사람의 잘못으로 38명 의원들이 보여준 열정과 열망을 한순간으로 날려버릴 수밖에 없다는 게 정말 죄송하다"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국회 앞에서 한 시민이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여해 테러방지법 반대 토론을 하고 있다./더팩트DB
국회 앞에서 한 시민이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여해 테러방지법 반대 토론을 하고 있다./더팩트DB

앞서 필리버스터 35번째 주자로 나선 박영선 비대위원은 "필리버스터를 끝내면 법안은 통과되겠지만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서 중단한다. 총선에서 승리해서 국민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호소했다.

백기를 들었지만 더민주로선 얻은 것도 있다.

야권 지지층을 결집했고,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투쟁적 성격을 보여온 여야 간 정쟁을 '민주주의 학습'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동안 5000여명이 넘는 시민이 국회 본회의장을 찾아 방청했고, 누리꾼들도 필리버스터 중단에 아쉬움을 나타내며 "고생했다"는 격려를 쏟아냈다.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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