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전 의원은 6일 지지자들과 오찬 회동에서 "큰 정치를 해야 한다"며 정계 복귀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정 전 의원이 이날 낮 12시께 전북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의 거처를 찾은 지지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순창=신진환 기자 |
[더팩트 | 순창=오경희·신진환·서민지 기자] "우리의 운명은 정치가 좌우한다. 리더십의 부재, 정치가 망국을 만든다. 여야를 떠나 지금은 '작은 정치'가 아닌 '큰 정치'를 해야 한다."
야권 신당의 한 축으로 부상 중인 정동영(62)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오랜 고민을 마치고 정계복귀를 시사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정동영 전 의원은 6일 칩거 중인 전북 순창의 토담집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암울한 현실 정치를 개탄하며 이기적인 '작은 정치'를 버리고 나라를 생각하는 '큰 정치'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정동영 전 의원은 지난해 4·29 관악을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뒤 같은 해 6월 고향인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산자락 토담집에서 7개월째 머물고 있다. 남북관계 정통 전문가이자 전 통일부장관으로서 '씨감자' 농사를 지으며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대륙으로 가는 길'을 암중모색해왔다.
그러나 요 몇 달 새 정 전 의원은 부쩍 고민이 깊다. 쌓아놓은 책들을 새벽녘이 돼서야 펼 수 있을 정도로, 토담집을 찾아온 이들은 그의 향후 정치행보와 결심을 묻는다. 최근 야권 재편 흐름 속에서 정 전 의원의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호남 신당을 추진 중인 천정배·박주선 의원 등 야권 주요 인사들이 그를 잇따라 찾아 러브콜을 보냈지만 말을 극도로 아껴왔다. 정치권에선 그의 '선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더팩트> 취재진도 5~6일 정 전 의원을 만나러 순창으로 향했다. 생각대로 그의 입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정 전 의원은 6일 점심께 지지자들과 '추어탕 회동'에서 정치권을 향한 의미심장한 여러 메시지를 던졌다. 취재진과 헤어지는 순간에도 "결심이 서면 얘기하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 "'운칠기삼'이다…운이 따라야"
정 전 의원의 아내 민혜경 여사가 취재진의 방문에 인사를 하고 있다./순창=서민지 기자 |
5일 오후 3시, 서울역 기준 자동차로 250여㎞·3시간 28분쯤을 달려 전북 순창에 도착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니 널따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 전 의원의 토담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심 넉넉한 주민들이 가리킨 곳은 파란 양철지붕의 외딴집이다.
마당에 들어서자 벌써 다른 손님이 15평 남짓한 토담집 앞 작은 별채(만남의 방)에서 정 전 의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또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집을 비운 상태다. 아내 민혜경(58) 여사가 대신 취재진을 맞는다. "시골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여기 내려오기 전엔 정신없이 지냈잖아요. 남편이 워낙 집에선 말씀이 없었는데, 이곳에 살면서 함께 아침 운동도 하고, (서로) 대화를 많이 해서 참 좋다. 신문도 TV도 보지 않는다. 앞만 보고 달렸던 생활에 쉼표를 그리며 지냈다(웃음)"며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어떡하죠? 오늘 오후에도 선약이 있으신데…"라는 민 여사의 말에 하릴 없이 취재진은 내일을 기약했다.
거처 인근 추월산 산책로에서 취재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정 전 의원./순창=신진환 기자 |
다음 날(6일), 정 전 의원을 드디어 마주했다. 오전 9시께 차를 타고 토담집에서 5분 거리인 추월산 산책로를 1시간 남짓 걸은 뒤였다. 아내도 함께였다. 산행을 마친 후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던 정 전 의원은 취재진의 "잘 지내셨냐"는 인사에 "잘 지냈지요~"라고 답하면서도 향후 행보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자"며 입을 다물었고, 토담집으로 자리를 옮겨 만나기로 했다.
다시 찾은 토담집엔 지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먼저 찾은 지지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정 전 의원은 때마침 점심 때라 뒤이어 온 약 10여 명의 지지자들 모두를 인근 식당으로 안내했다. 취재진도 뒤따랐다.
식사 메뉴는 '추어탕'. 테이블 위엔 자연스레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 전 의원의 역할을 기원하는 지지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는 답사를 겸해 한마디를 했다.
"경향각지의 동지들이 이렇게 모여서 금년에 소원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또 큰 행사가 있으니까. 운칠기삼(運七技三,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려 있는 것이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고. 운이 따라야 하니까. 여기가 좋은 동네예요. 마을 이름이 '복흥'입니다. 새해 복을 받으려면 땅기운을 받아야죠."
◆ "작은 것으로 갈라져…돌파구 찾아야"
정 전 의원이 지지자들과 거처 인근 한 식당에서 추어탕을 함께 먹으며 대하를 나누고 있다./순창=서민지 기자 |
약 40분쯤 흘렀을까. 지지자들의 응원과 바람을 묵묵히 듣던 정 전 의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사회가 지금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또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모순이다. 3만 불 시대 즉, 선진국으로 올라섰는데도 말이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선 600년사를 보면,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전통적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 희망의 출구가 안 보인다."
정 전 의원은 '출구없는 시대'의 돌파구를 '대륙으로 가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대안으로 내세운 발언 속엔 여러 정치적 메시지가 얽혀 있다. "고령화·저출산·저성장 사회로 25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일본과 우리는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도 일본과 우리가 다른 게 딱 하나 있다. 한국에는 '북쪽'이 있다. 대륙으로 가는 길만 뚫으면 무궁무진한 기회가 생긴다"면서 "(그 기회와 희망이) 눈앞에 있는데 정치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저는 뭐 새누리당이 어떻고, 야당이 어떻고 하는, 그런 작은 정치보다는 이게 정말 큰 정치가 아닌가. 지금 사실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대상이지 않나. 대상, 주체가 아니라 객체라고 하죠. 국민이 손님 취급을 당하는 거다. 주인은 배지를 붙인 의원이라든지, 행정부 간부라든지 대통령 등 이런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이고, 정작 주인은 주인 대접이 아니라 손님 취급을 당한다. 민주주의의 갈 길이 더 남아 있다."
지지자들과 점심 식사 후 이춘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친상 조문 직전 취재진과 만난 정 전 의원./순창=서민지 기자 |
특히 정 전 의원은 '리더십의 부재'를 지적했다. "역사가 그냥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깜박 졸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조선 말기에 꼭 나라가 망할 운명이었나. 망하게 만든 정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있었고, 대원군이 있었고, 명성황후가 있었고 그 정치가 망국으로 몰았던 것"이라면서 "후세대에 해줄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최우선 과제가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에서 물건을 자유롭게 사고팔지 못하는 나라가 한 나라밖에 없다. 국민들이 하루하루 먹고살고 밥벌이가 힘든데, 이게(대륙으로 가는 길) 막혀 있어선 다른 출구가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을 해도 안 되고 박근혜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해도 안 되지 않나. 대한민국의 혈을 뚫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책로를 걷는 정 전 의원. 야권 재편 세력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그는 "결심이 서면 얘기하겠다"며 취재진을 배웅했다./순창=신진환 기자 |
지지자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야 취재진은 정 전 의원과 마주앉았다. "출구를 언제쯤 뚫으실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중국에 황사가 많이 껴서"라며 농담을 건넨다. 이어 "회동 자리에서 할 말은 다 한 것 같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결심이 서면 얘기하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취재진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