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을미적거렸지만, 병신이 돼도 가야 하리"
입력: 2015.12.28 10:39 / 수정: 2015.12.28 10:39
문제는 지금 별이 뜨는 밤을 기다릴 여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오아시스나 우물을 찾지 못하면 위태로우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이다.  /더팩트DB
문제는 지금 별이 뜨는 밤을 기다릴 여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오아시스나 우물을 찾지 못하면 위태로우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이다. /더팩트DB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거리다 병신이 되면 못 가리~.”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인 1894년에 백성들이 불렀던 민요다. 1894년은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해이다. 이 민요에 한자를 붙이면 그 뜻이 손에 잡힌다. “갑오(甲午)세,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 가리~.”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의 간지(干支)가 갑오(甲午)년이다. 농민들도 느낌과 감(感)으로 알았다. 갑오년에 부패청산과 내정개혁이 이뤄지지 못하면,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에 휘둘린다는 것을. 해를 넘기고 또 (을)미적거리다 자칫 나라도 백성도 병신(病身)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미래로 못 간다는 것을.

이미 알다시피 갑오 동학혁명은 한(恨)만 남기고 끝이 났다. 을미년은 일본의 미우라 고로 등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弑害)해 조선 백성에 치욕을 안겼다. 그리고는 어떻게 됐나.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걷지 않았나. “가보세~” 민요는 소름 끼칠 정도로 실제와 부합한 상황인식과 예언이 아닌가.

두 갑자(甲子)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에 오싹하기까지 하다. 미국과 일본과 중국이 일으키는 삼각파도에 동북아가 요동치는데, 남북은 여전히 긴장상태이고, 정쟁(政爭)으로 날밤 지새우는 정치는 민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두가 수렁에 빠져 있는데, 서로 머리채와 멱살을 잡고 다투는 형국이다.

유기준 유일호 정종섭 최경환 황우여 김희정 장관은 직을 내려놓고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문병희 기자
유기준 유일호 정종섭 최경환 황우여 김희정 장관은 직을 내려놓고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문병희 기자

모든 정권은 집권 초 부패청산과 내정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아니면 영혼이 없는 공직자들은 ‘복지뇌동’하며 세금만 축내기 마련이다. 여기서 ‘복지뇌동’은 한자가 두 가지다. 하나는 ‘납작 엎드려 머리만 굴린다(伏地腦動)’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납작 엎드려 꼼짝 않는 복지부동(伏地不動)’과 ‘소신 없이 남들 하는 데로 따라 가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의 복합어로 복지뇌동(伏地雷同)이다. 이런 뜻이나 저런 뜻이나 오십보백보이니 그냥 한글로 써도 서로 통한다.

그런데 집권 2년차 갑오년은 세월호와 가라앉았고, 3년차 을미년은 메르스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어언간 정권은 반환점을 돌았다. 출발선에서는 반환점이 멀어 보이지만, 반환점을 돌고 나면 종착점은 순식간이다. 공직자들은 벌써 총선 앞으로, 아니면 승진 줄서기로, 더러는 다음 정권을 보며 버티기로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새해 첫날 국립현충원을 찾아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고 적었지만 올해 역시 메르스로 힘겨운 한 해를 보냈다. /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새해 첫날 국립현충원을 찾아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고 적었지만 올해 역시 메르스로 힘겨운 한 해를 보냈다. /청와대 제공

어찌 해야 하나. 정치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국민이 정치를 걱정한다. 공공부채는 1000조 원이라 하고, 가계부채는 1200조원이라 한다. 얼마 전 경제부총리는 우리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대입하면 5년쯤 단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15년은 앞이 캄캄하다는 이야기인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던 ‘낙수효과(Trickle Down)’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면 물이 계단식 논을 따라 아래로 흐를 줄 알았다. 그런데 부자들은 꼭대기에 댐을 만들고 물을 가뒀다. 기업은 사내유보로, 개인은 저축과 해외투자로 돈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돈의 흐름이 막혀 경제가 ‘돈맥경화’에 비틀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주장하고 추진한 ‘낙수효과(Trickle Down)’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더팩트DB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주장하고 추진한 ‘낙수효과(Trickle Down)’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더팩트DB

선진국의 해답은 ‘분배를 통한 성장’이다. 노동자들이 돈을 벌어야 돈을 쓰지 않겠는가. 그렇게 수요를 창출해야 기업도 이윤을 내고 돌아가지 않겠나. 이게 ‘돈맥경화’를 풀고, 경제가 선순환하는 길이라고 그들은 여기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쉬운 해고’ 한마디에 노동자들은 모두가 지갑을 닫고 있다. 지갑을 닫으면 경기가 위축되고, 그러면 기업이 힘들어지며, 자연히 ‘쉬운 해고’는 더 늘어난다. 악순환 고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선진국을 향해 제대로 가보지도 못하고 을미적거리다 병신년을 앞에 둔 지금,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120년 전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그러한 상황의 반복을 피하지 못한다면, 과연 역사는 왜 배우는 것인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보다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시급하지 않는가.

혹자는 역사를 “술에 취한 사람이 별도 없는 밤에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스스로 앞을 향해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방향을 잃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제자리에 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걸어온 길 뒤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나아간다고 해서, 무작정 앞을 향해 간다고 해서 진보(進步)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사막과 초원이 대부분인 몽골에 그럴듯한 격언이 있다. “길을 잃으면 밤을 기다린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어디가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치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쪽일까, 저쪽일까 왔다갔다하다 보면 기진맥진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별이 뜨는 밤을 기다리며 체력을 아끼는 것이다. 별이 뜨면,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향을 가늠해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했다가 자칫 “이 산이 아닌 모양이다”하면 곤란하다.

문제는 지금 밤을 기다릴 여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오아시스나 우물을 찾지 못하면 위태로우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래도 무심한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에서 잉태됐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 듯한 순례자의 길에서. 결국 바다에 맞닥뜨릴 숙명의 길 말이다. 한센씨병에 걸린 시인 한하운이 오월의 보리밭을 지나 소록도로 향하는 황톳길에서 발가락 하나씩 잃어갈 때도 마찬가지로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결국 길을 가는 것이다. 미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머뭇거리면 안 된다. 쓰러져도 가야 한다. ‘산티아고 길’을 좋아했던 헤밍웨이가 ‘바다와 노인’의 주인공 이름으로 ‘산티아고’를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길’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늙은 어부인 산티아고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라도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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