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포기한 ‘인민’과 빼앗긴 ‘동무’의 회복
입력: 2015.11.30 11:56 / 수정: 2015.11.30 11:56
민중총궐기 시위 이후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중재 요청을 논의를 하기 위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화쟁위원회 회의에 위원장인 도법 스님(왼쪽) 등 위원들이 회의실로 이동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민중총궐기' 시위 이후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중재 요청을 논의를 하기 위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화쟁위원회 회의에 위원장인 도법 스님(왼쪽) 등 위원들이 회의실로 이동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우리는 언제부턴가 ‘1등과 나머지’의 사회가 됐다. 은메달을 따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다. 그 안타까움은 주목 받지 못하는, 곧 잊혀질 운명이기 때문일까.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가 소치 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물렀을 때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밴쿠버의 금메달로 이미 세계 1위이라서일까.

아마도 승자독식(勝者獨食),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풍조가 만연한 탓이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삼권분립인데, 우리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선거에서 1등이 권력을 독식하는 구조이다. 국회도, 사법부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의 거수기나 집달리쯤 아니냐는 자조(自嘲)적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한 분야에서 1등 기업은 기타 기업들을 종속시켜 버린다.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해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재벌이 된다. 나머지는 하청기업 신세다. 삼성이 그렇고, 현대자동차가 그렇다. 진정한 재벌이냐 아니냐는 사면복권 대상이 되는지 기준이다. 그런 측면에서 SK도 그 분야 1등이다.

언론계는 어떨까. ‘1등과 나머지’의 구조가 적용될까. 우선 미디어를 보자. 영향력을 기준으로 과거에는 단연 ‘신문>방송’이었다. 그런데 88올림픽을 계기로 ‘신문=방송’쯤 됐다가 1997년 IMF이후 급속히 ‘신문<방송’으로 기울었다. 경제적인 상황과 미디어 소비행태가 그런 변화를 촉발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개화(開花)가 역설적으로 신문의 조락(凋落)을 야기했다는 분석도 있다. 신문은 군사독재 시절, 방송이 권력에 장악된 시절에 민주주의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행간(行間)의 촌철(寸鐵)’로 대변되는 저항의 몸짓에 시민들은 구독(購讀)으로 지지했다.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백지광고’가 실렸지만, 이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 채운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1987년 넥타이부대가 일으킨 민주화 물결에 군사독재가 밀리면서 ‘행간(行間)’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엔 자유와 풍요가 넘쳐났고, 그런 속성은 TV에 더 어울렸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삼권분립인데, 우리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선거에서 1등이 권력을 독식하는 구조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오전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위해 입장하고 있다. 정의당 의원들이 국정화 반대 피겟시위를 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민주주의의 기초는 삼권분립인데, 우리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선거에서 1등이 권력을 독식하는 구조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오전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위해 입장하고 있다. 정의당 의원들이 국정화 반대 피겟시위를 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그럼에도 신문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유효한 듯하다. ‘인터넷>방송>신문’으로 기울어버린 미디어 지형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원천은 무엇일까. 활자(活字)가 편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신문을 읽기 때문일까. 영화 ‘내부자들’이 폭로했듯이 ‘권력의 재생산’에 여전히 유효해서일까.

무엇보다 신문의 ‘의제설정 능력’ 때문일 것이다. 영어로 이슈메이킹(Issue-making)이라 하는데, 본디 언론의 대표적인 기능이 ‘여론 형성’이 아닌가. 그 측면에서 현재로는 조선일보가 강하다. 필자가 현역일 때 조선일보의 의제설정을 두고 “무식하게 밀어붙인다”고 힐난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워했던 것이 그런 뚝심이었다.

스스로가 의제를 설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신문이 끄집어낸 의제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 신문보다 몇 배 이상 지면을 배정하면서 더 오래 집중보도 해 자신의 의제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자신들이 ‘1등 신문’이라는 자신감, 따라서 사회적 의제는 자신들이 설정해야 한다는 자부심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조선일보가 올해 초 ‘통일’을 이슈로 설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과 연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던가. 더욱이 반공(反共)보수의 첨병으로 알려진 조선일보의 ‘통일’ 이슈에 일부는 머리를 갸웃하기도 했지만, 시대적 의제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물론 ‘통일나눔펀드’는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이미 논의된 ‘통일세’를 만들 수도 있고, 기왕의 남북협력기금을 확대할 수도 있다. 통일비용은 국가가 대비해야 하는 것인데, 한 신문이 주도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가 하는 문제제기다. 그렇지만 상당수는 기대감도 가졌다. 추진 주체가 조선일보라는 점에서 통일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의 일대 전환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지난 14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했다. /더팩트DB
지난 14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했다. /더팩트DB

실제 오늘도 실린 통일나눔펀드 동참 명단은 신문 한 면의 절반에 이른다. 그 지면에는 분명하게 ‘남북 동질성 회복’을 목표로 적시하고 있다. 홈페이지도 1번으로 ‘남북 동질성 회복’을 내세우고, 그 실천방법으로 ‘언어, 역사 이질성 회복’을 표방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언어’이다.

남북한의 ‘언어’는 분단 70년을 지나면서 많이 달라졌다. ‘괜찮다’와 ‘일없다’의 차이가 유명하지만, 외래어는 받아들이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코너 킥을 ‘구석 차기’로,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표기하는 것은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이러한 ‘언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최근 사설(社說)에서 드러낸 인식은 매우 유감스럽다. ‘전교조 위원장 입에서 튀어나온 인민’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인민은 국어사전에 나온 말이긴 하지만 우리 국민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이다. 우리는 ‘국민’이라 쓰고 북한에서 ‘인민’이라고 하는 것이 굳어진 지 오래이다”면서 ‘인민’을 입에 올린 전교조 위원장의 ‘의식세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나중에 ‘빈민’을 ‘인민’으로 잘못 알았다며 사과문을 실었지만, 필자는 못내 아쉬웠다. 남북동질성 회복을 목표로 언어의 이질성을 극복하자는 조선일보라면 우리가 잃어버린, 빼앗겨버린 언어를 되찾는 노력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다.

특히 조선일보는 의제설정에 강하고, 남들이 먼저 제기했더라도 자신들이 ‘무식하게(?)’ 밀어붙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타(他)의 추종 불가능한 능력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사용을 포기한 ‘인민’, 북한에 빼앗겨버린(?) ‘동무’를 다시 우리 것으로 회복시키는 노력을 보일 때 진정 ‘통일’의 의제설정에 진정성이 담기고, 모두가 놀란 눈으로 기대감을 나타내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사설대로 국어사전에 나온 단어를 우리 국민에 왜 거의 쓰지 않게 되었는가. 남북이 대치하며 경쟁하던 시기에, 사실 국력이 밀리던 시기에, 북한이 주요하게 쓰는 언어라서 ‘빨간딱지’를 붙인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20배 이상 부강하고, 국제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여러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 포기한 ‘우리 말’을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경우회·탈북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민중총궐기 시위 후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체포를 촉구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지난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경우회·탈북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민중총궐기' 시위 후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체포를 촉구하고 있다. /문병희 기자

인민은 영어로 ‘People’이고, 국민은 ‘Nation’이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People’을 위한 민주주의를 말했지, ‘Nation’을 위한 민주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감 결여 시대에 스스로 ‘인민’이란 용어를 기피하는 바람에 ‘인민을 위한…’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이 됐다. 이는 민주주의 본디의 뜻과 뉘앙스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동무’가 아쉽다. 북한은 ‘Comrade’를 ‘동무’로 번역하면서 우리가 포기한 단어가 됐는데, ‘동무’야말로 순 우리말로서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을 포기하면서 ‘동무’는 한자어인 ‘친구’로 대체됐다. ‘어깨동무’도 멋쩍게 ‘어깨친구’라고 부르며 웃는 실정이다.

엊그제 한국ABC협회가 발행부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선일보가 전국 일간신문 159사 가운데 1등이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발행부수 1등이 꼭 ‘1등 신문’인 것은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신문은 1000만부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이 아니라 이에 250만부나 모자란 아사히신문을 꼽는다. 쉽게 말해 요미우리신문은 많이 팔리는 신문이지, 일본의 대표신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110만부 남짓한 미국의 뉴욕타임스나 영국의 가디언이 많이 팔려서 ‘1등 신문’으로 일컫는 것은 아니다.

‘통일’을 의제로 설정한 조선일보가 차제에 자신이 선언한 대로 ‘언어의 이질성 회복’에 나섰으면 좋겠다. 그래서 군사독재 시절 포기했던 ‘인민’과 빼앗긴 ‘동무’를 스스럼없이 우리말로 쓸 수 있도록 회복하는데 앞장섰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1등 신문’의 면모일 것이다. ‘인터넷>방송>신문’ 시대에 과거 전성기의 절반에 불과한 발행부수, 그것도 갈수록 줄어드는 구독부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ps.tea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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