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YS는 떠났습니다' 지난 22일 서거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이 지난 26일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엄수됐다./국회=임영무 기자 |
[더팩트 | 오경희 기자] 지난 22일 새벽, 눈을 번쩍 떴다. '[긴급]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메시지가 휴대전화를 요란스레 울린다. '큰일이다' 머릿속이 하얗다. 폐렴 증세로 입퇴원을 반복해왔기에 '결국 떠나셨구나'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오전 2시, "0시 22분 김 전 대통령이 패혈증과 급성신부전으로 서거했다"는 서울대병원의 브리핑이 나왔다. 허둥지둥하는 사이, 동이 튼다. 밤새 세상엔 수백 수천 개의 기사가 쏟아졌다. 곧장 빈소로 향한다. 초조하고 복잡한 마음이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YS의 서거를 실감한다. 이미 수많은 취재진이 진을 쳤다. 죽음에 귀천은 없지만,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사건'이다. 서둘러 자리를 잡고 상황을 살핀다.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고급 차량이 빈소 앞에 멈춘다. 촉각을 곤두세운다. '누굴까' 희끗한 머리에 주름진 얼굴, YS와 시대를 함께한 원로들이 잇따라 빈소를 찾는다. 젊은 기자들은 원로의 이름과 YS와의 인연 찾기에 두뇌 회로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죄송합니다...'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운데 빈소를 찾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침울한 표정으로 조문을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유족과 정부는 5일간의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장례 둘째, 셋째, 넷째 날…. 점점 눈꺼풀은 처지고 피곤이 몰려온다. 그러나 긴장을 풀 수 없다. 조문객들의 클래스가 어마어마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총재, 총리, 국회의장, 여야 대표, 전·현직 의원, 기업 총수 등 평소 쉽게 볼 수 없던 정·재계 인사들이 앞다퉈 애도를 표한다. 정치권은 다시 빈소 안팎에서 김 전 대통령의 유지인 '통합과 화합'을 이야기한다. 빈소 자체가 '역사'이자 '정치'다.
YS의 '영정' 앞에선 여야도, 악연도 '세상사 부질없는 일'인 듯했다. 당내 주도권 싸움을 벌여온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과 김무성 대표가 상주를 자처했다. 진짜 아들이자 상주인 차남 현철 씨와 김 대표는 썩 좋은 사이가 아닌 것으로 알려졌지만, 빈소에선 손을 마주 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으론 아이러니하다. 민주화의 상징인 YS의 '정치적 아들들'이라고 말하는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이 박근혜정부 여당의 지도부라는 사실이 말이다. YS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정권에 맞서지 않았나.
'영면하시게...' 전두환 전 대통령이 25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각설하고, 악연의 골이 깊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등도 명복을 빌며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인다. 정계은퇴 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이 전 총재와 검찰의 미납추징금 환수로 최근 인생 일대 모진 시간을 보낸 전 전 대통령의 등장에 취재진도 비상이 걸렸다. 전 전 대통령을 놓칠새라 경호원들과 고성과 몸싸움이 오갔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은 발인 바로 전날인 25일 갑작스레 빈소를 찾았다. 개인적으론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군부 정권에 저항하는 김 전 대통령을 가택 연금했고, 김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주도한 역사 바로세우기 드라이브와 5·18 특별법 제정으로 전 전 대통령은 '12·12'와 '5·18'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하지만 주검 앞에 미움도 덧없는 것일까. 물론 전 전 대통령은 '화해로 봐도 되는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빈소를 빠져나갔다. '악연, 전두환 YS 빈소 방문'이란 여러 매체의 기사들 아래 한 누리꾼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왜 우리는 살아있을 때, 미안하다 말하지 못하는 걸까"라고 말이다.
'아버지...아버지...편히 쉬세요...' 영결식이 엄수된 26일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엄수된 가운데 차남 김현철 씨가 생전영상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그리고 26일, 국회 앞뜰엔 서설(瑞雪)이 흩날린다. 이날 오후 2시 최연소·최다선 YS의 운구 차량이 국회로 들어선다. 의회 민주주의자이자 9선 의원의 마지막 등원이었다. 영하 2도의 날씨 탓일까.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저리다. 팔목에 묶인 '근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프레스 띠가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마음 속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 '청산에 살리라' 추모곡이 국회 허공을 가른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청산에 살리라...거산, 영원히 잠들다...' 영결식에 이어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엄수된 안장식에서 김 전 대통령의 관이 하관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오후 5시, 민주화의 거산(巨山) YS는 청산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반평생을 함께한 동작구 상도동 사저 인근의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생전 YS는 독재에 맞서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그는 떠났지만 해는 떴다. 영정 앞의 '통합과 화합'의 약속이 헛되지 않기를…. 이 시대의 '청산'은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