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서거와 사망, 탄신과 출생 사이에서
입력: 2015.10.26 11:25 / 수정: 2015.10.26 11:25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배경으로 2017년이 부각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이 2012년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도식에서 묵념을 하는 모습./임영무 기자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배경으로 2017년이 부각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이 2012년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도식에서 묵념을 하는 모습./임영무 기자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끔찍한 말은 입에 올리기가 두렵다. 말 자체가 '주문(呪文)'이 돼 배회하거나 심지어 발설자를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죽었다'는 표현은 되도록 글로도 말로도 꺼린다. 가족이나 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스승이나 어른에게도 삼간다. 비록 객관적이면서 사전적인 문구이지만 지나치게 직접적이면서 예의에 어긋난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둘러 표현한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흙에서 비롯된 생명이 흙으로, 공(空)에서 생겨난 색(色)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간 것이다. 영어에서도 '죽다'란 뜻의 'die'를 피해 'pass away'를 쓴다. 이는 이승에서의 짧은 생을 마치고, 망각의 강 '레테(Lethe)'를 건너 저승으로 떠났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돌아간다'는 것은 윤회(輪廻)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비롯된 곳은 '생김'과 '나옴'의 근원이 아니던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만, 새 아침이 밝으면 또다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윤회의식이 없는 서양에서는 그저 차안(此岸)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버리는(pass away) 것이다. 하데스(Hades)가 지배하는 땅속이든, 예수님과 함께하는 천국이든.

영어 표현에 주의할 점은 부사의 위치인데, 'pass away peacefully'는 '고이 잠들다'로 번역되지만, 'pass peacefully away'는 '안락사(安樂死)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돌아가셨다'는 훌륭한 우리말을 두고 굳이 한자(漢字) 표현을 고집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높이기도 낮추기도 어정쩡하거나, 너도나도 쓰는 표현 대신에 좀더 '태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담으려는 심산에서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보편적인 표현이 '사망(死亡)'이다. 말 그대로 '죽어 없어졌다'는 뜻이다. 죽음에 이런저런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법률적으론 자연인(自然人)이 생명을 잃었다는 뜻이다.

사망보다는 좀더 존경과 아쉬움을 담은 표현이 별세(別世)이다. 세상과 이별했다는, 그래서 안타깝다는 뜻이다. 간혹 '이승을 하직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웃어른이 생존해 계신 어른의 별세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원래 하직(下直)은 먼 길을 떠날 때 웃어른께 작별을 고(告)하는 것이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서거-급서-급사-사망-죽었다로 다양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아마도 검인정 역사교과서 역시 비슷한 표현을 쓸 것이다. 비록 서거가 사거의 높임말이고 사망이 법률적으로도 가치중립적 표현이지만, 이런 정도로 혼용돼 나타나는 것 역시 다양성의 단면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배정한 기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서거-급서-급사-사망-죽었다'로 다양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아마도 검인정 역사교과서 역시 비슷한 표현을 쓸 것이다. 비록 '서거'가 '사거'의 높임말이고 '사망'이 법률적으로도 가치중립적 표현이지만, 이런 정도로 혼용돼 나타나는 것 역시 '다양성'의 단면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배정한 기자

사거(死去)란 표현도 있다. '죽어 세상을 떠났다'는 뜻쯤이다.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죽었을 때 도하 신문들이 1면에 '日王 死去(일왕 사거)'라 보도했다. 별세(別世)라고 하자니 대한제국 침략의 장본인인데 존경과 아쉬움을 담을 수 없다는 판단이고, 사망(死亡)이라고 하자니 그래도 이웃나라 왕이 아니냐는 배려에서다.

일왕 히로히토가 대한제국 침략에 대해 '통석(痛惜)'이란 표현을 써 사과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한 만큼, '사거(死去)'란 표현도 외교적 결례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피장파장에 장군멍군쯤으로 당시엔 받아들여졌다.

물론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는 모두가 '사망(死亡)'이라고 했다. 물론 '별세'로 표현했다면 당장 국가보안법 위반쯤으로 치죄됐겠지만, 만일 '사거'로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당국이 '높임 표현'으로 판단해 국가보안법을 들이댔다면 일왕의 죽음에도 '높임 표현'을 한 것이 되는데 말이다.

사실 '사거(死去)'는 영어의 'pass away'쯤이다. 이 '사거(死去)'를 높인 말이 '서거(逝去)'이다. 비슷한 높임으로는 별세(別世)와 함께 '운명(殞命)'과 '작고(作故)'가 있다. '운명(殞命)'은 주어진 천수를 다했다는 뜻이다. '작고(作故)'는 말 그대로 '고인이 됐다'는 뜻인데, 돌아가신 분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이는 연유이다.

옛날 왕이 죽었을 때는 '붕(崩)'이라 했다. 그야말로 태산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일반인이 이런 표현을 쓰면 그야말로 '역적'이다. 선비나 백성의 죽음은 훙(薨), 망(亡), 몰(沒,歿), 졸(卒)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10월 26일)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운명한지 36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1세기에 박 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네이버를 검색해 봤다. 인물검색에서는 '출생-사망 1917년11월14일, 1979년10월26일'로 가치중립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백과'는 '서거(逝去)'로 표현하고 있다. '서거'는 위에 소개한대로 '사거'의 높임말이다. '시사상식사전'은 갑자기 서거했다는 뜻의 '급서(急逝)'로, '한국근현대사사전'은 '급사'로, '학생백과'는 '사망'으로, '어린이백과'는 '죽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얼핏 둘러봐도 '서거-급서-급사-사망-죽었다'로 다양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아마도 검인정 역사교과서 역시 비슷한 표현을 쓸 것이다. 비록 '서거'가 '사거'의 높임말이고 '사망'이 법률적으로도 가치중립적 표현이지만, 이런 정도로 혼용돼 나타나는 것 역시 '다양성'의 단면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기술(記述)에 주관적 견해나 일방적 주장이 들어가는 순간 그 기록은 죽음으로의 여정(旅程)으로 바뀌게 된다. 문제는 이 또한 역사의 일부여서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자칫하면 흑역사(黑歷史)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는 항상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하면서 붓끝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기자신을 담는 것이다./문병희 기자
역사의 기술(記述)에 주관적 견해나 일방적 주장이 들어가는 순간 그 기록은 '죽음으로의 여정(旅程)'으로 바뀌게 된다. 문제는 이 또한 역사의 일부여서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자칫하면 '흑역사(黑歷史)'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는 항상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하면서 붓끝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기자신을 담는 것이다./문병희 기자

물론 운명할 때의 상황도 제각각 표현한다. 당시 신문들은 '시해(弑害)'라는 표현을 썼다. '시해'는 '시살(弑殺)'과 같은 말로, 사전적으로는 '임금이나 부모를 죽임'이다. 아마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권력자여서 임금과 마찬가지로 여겼든지, 최소한 국부(國父)란 인식에서였을 것이다. 고(故)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운명했을 때도 '국모(國母)를 시해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는 '피격(被擊) 사망(死亡)'으로 객관화됐다. 보기에 따라선 '메마른 표현'일 수 있지만.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배경으로 2017년이 부각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탄신(誕辰)'을 사전적으로 보면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난 날'이다. 이들의 생각은 '대통령=임금'이거나,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이 '성인(聖人)'의 반열에 든다고 여겨서일까. 나아가 '반신반인(半神半人)'이란 표현까지 당당하게(?) 내세운다.

굳이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찾는다면 '출생(出生)'이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객관적이지만 좀 딱딱해 보인다. 그렇다면 '탄생(誕生)'정도가 어떨까. '탄생'이 "옛날에는 성인(聖人) 또는 귀인(貴人)이 태어남을 높여 이르는 말이었으나 현대에는 사람이 태어남이란 뜻으로 쓴다"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예문으로는 '공자의 탄생'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다' '문명의 탄생' '사내 커플 탄생'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공자(孔子)도, 아들도, 문명도, 커플도 '탄생'하니 이 역시 가치중립적 표현이 아닐까. 추종자들이 말하는 '탄신'과도 발음도 느낌도 비슷하고 말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도 '사실의 선택' 못지않게 이러한 '표현의 선택'에 부심(腐心)할 것이다. 사전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온당한 표현이라도, 색안경을 끼고 보면 예의범절이 없거나 반대쪽의 극단으로 비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가치중립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느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비록 이 객관성이 '역사가의 객관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역사의 기술(記述)에 주관적 견해나 일방적 주장이 들어가는 순간 그 기록은 '죽음으로의 여정(旅程)'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암(癌)보다 신속하게 급사(急死)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또한 역사의 일부여서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자칫하면 '흑역사(黑歷史)'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는 항상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하면서 붓끝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기자신을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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