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철면피에 흑심 품어야 대권 잡는가
입력: 2015.09.21 14:17 / 수정: 2015.09.24 11:46
이합집산은 결탁과 배신의 다른 말이다. 박근혜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면서 바야흐로 현대판 축록(逐鹿)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임영무 기자
이합집산은 결탁과 배신의 다른 말이다. 박근혜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면서 바야흐로 현대판 '축록(逐鹿)'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임영무 기자

초(楚)와 한(漢)의 패권다툼은 그 자체로 정치교과서이다. 명분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이다. 결론은 이미 안다. 힘은 산을 뽑고, 기는 세상을 덮을만한 항우였지만, 해하에서 사면초가에 빠져 결국 자결하고 만다. 항우에게 무릎도 꿇고, 싹싹 빌고, 비겁하게 달아나기도 했던 유방은 단 한번의 승리로 천하를 차지한다.

승패의 원인과 이유를 꼽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월 발간된 '초한지 후흑학(신동준 지음, 을유문화사)'은 인간성을 바탕으로 패권의 향방을 분석했다. 바로 '후흑(厚黑)'인데, 청나라 말기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두됐던 책략이다.

여기서 후흑(厚黑)은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의 합성어다. 면후는 말 그대로 두꺼운 낯짝, 즉 뻔뻔함이다. 심흑은 검은 속, 즉 음흉함이다. 상대 표현은 면박(面薄)과 심백(心白)이다. 얼굴 가죽이 얇아 속이 그대로 드러나고, 마음이 깨끗하고 거리낌 없는 사람이다.

후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을 꼽는다. 그는 오(吳)나라를 쳐 합려(闔閭)를 죽게 하지만,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도 복수를 다짐한다. 가시 많은 섶에 누워 자면서 "부차야, 너는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고 외치게 하며 복수의 칼을 간 것이다. 이를 안 구천이 먼저 침략하지만, 도리어 자신이 사로잡히게 된다. 부차에게는 미녀 서시(西施)를 바치고, 신하에게는 뇌물을 바쳐 목숨을 구한다. 이후 쓰디쓴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결국 부차를 죽인다.

역시 오자서(伍子胥)가 맞았다. 이겼을 때는 후환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괜히 살려뒀다가 나중에 당하는 일이 역사에서 어디 하나 둘이던가. 영어에도 'Just Shoot, Don't Talk(그냥 쏴라, 말하지 말고)!'라는 말이 있다. 괜히 질질 끌면서 승리를 좀더 즐기려다가 반격 당하는 것이다.

정치의 계절에 가장 많은 사람은 역시 면박심흑(面薄心黑)이겠다. 이런저런 계책을 내놓지만, 그 중에는 탁월한 계책도 있겠지만, 받아주지 않으면 그뿐이다./임영무 기자
정치의 계절에 가장 많은 사람은 역시 '면박심흑(面薄心黑)'이겠다. 이런저런 계책을 내놓지만, 그 중에는 탁월한 계책도 있겠지만, 받아주지 않으면 그뿐이다./임영무 기자

월왕 구천의 현대판을 등소평으로 보기도 한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춰 드러나지 않게 한 뒤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즉 약자가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축적한다는 뜻이다. 1980년대 대외적으로 봉쇄된 중국으로서 미국과 유럽 강대국 눈치를 살피면서 '개혁개방'으로 경제력과 외교력을 키운 정책이다. 삼국지에서 조조에 잡힌 유비가 농사를 지으면서 천둥번개에 놀라는 척한 것도 도광양회 술책이다.

다시 초한지 후흑학으로 돌아가자. 저자는 사슴을 쫓던 영웅들을 넷으로 분류한다. 먼저 '면박심백(面薄心白)'으로 항우가 대표적이다. 속마음을 숨기지도 않고(못하고), 마음도 거리낌이 없이 깨끗하다. 전형적인 귀족의 후예답다. 이들 가진 자는 굳이 자신의 속을 숨길 필요도,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따라서 사람들을 대할 때 거리낄 것도 없다. 어찌 보면 대범하면서 깔끔하다.

다음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유방과 장량이 대표적이다. 동네 조폭 우두머리쯤이었던 유방은 예의염치는 헌신짝이요, 홍문연(鴻問宴)에선 항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해 달아난다. 그럼에도 결국 민심을 얻어 천하를 손에 넣는다. 그 옆에는 장량이 있었다. 범증과의 지모대결에서 지는 듯 이겨, 천하를 평정한 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진리를 남긴 범려의 예를 따라 종적을 감춘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와신상담의 최종 승리자로 등극시킨 뒤 "날랜 토끼가 사라지면 사냥개는 삶기게 되고, 높이 나는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은 치워진다"고 갈파하곤 홀연 떠나버린다.

다음은 '면후심백(面厚心白)'으로 한신과 소하가 있다. 동네 양아치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면서도 큰 뜻을 품은 한신. 그만큼 낯가죽은 두꺼웠지만, 괴철의 꾀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방을 믿기로 한다. 하지만 "나는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多多益善)"고 자랑하는 한신을 유방이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나.

마지막은 '면박심흑(面薄心黑)'으로 천하의 모사 범증과 괴철을 든다. 이들은 천하향방을 바꿀 묘한 계책을 갖고 있지만, 너무나도 담백하게 이를 전한다. 범증은 유방을 "죽이라"고 했지만 항우가 거절하자 결국 떠나버린다. 괴철은 삼국지의 제갈량에 앞서 '천하 삼분지계'를 건의하지만, 한신이 머뭇거리자 '토사구팽'을 말하며 떠난다.

후흑의 극치는 철면피도 아니고 흑심도 없다(不厚不黑)라고 상대와 대중이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의와 도덕의 옷을 입고, 말은 애매모호해야 한다고 한다. 명백하게 말하면 반드시 발목을 잡히게 되니까./문병희 기자
후흑의 극치는 "철면피도 아니고 흑심도 없다(不厚不黑)"라고 상대와 대중이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의와 도덕의 옷을 입고, 말은 애매모호해야 한다고 한다. 명백하게 말하면 반드시 발목을 잡히게 되니까./문병희 기자

자, 여전히 정치의 계절이다. 푸르던 잎 단풍으로 변하면서 철새는 떠나간다. 이합집산은 결탁과 배신의 다른 말이다. 박근혜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면서 바야흐로 현대판 '축록(逐鹿)'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면후심흑'으로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릎도 꿇고, 싹싹 빌기도 하고, 수족도 잘라내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역전의 한방을 노린다. 그런데 그가 속마음을 숨기지도 않는 것 같고, 말도 거리낌없이 한다. 그러면 '면박심백' 아닌가?

누구는 '면박심백'으로 모든 것을 내비치며 사슴을 쫓는 것으로 보인다. 축록자불고토(逐鹿者不顧兎),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 법인가. 반대는 반대일 뿐이다. 하물며 출신도, 경력도 화려한데다 지지세력도 만만치 않지 않나. 그러면 결국 사면초가에 몰려 오강에서 자결하는 길인가!

누구는 '면후심백'으로 큰 뜻을 품고 있으나 우유부단해 보인다. 그 역시 백성들이 지지하지만, 결정적일 때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는 누군가 '천하 삼분지계'라도 들이밀면 못이기는 척 받을 것인가.

이런 계절에 가장 많은 사람은 역시 '면박심흑'이겠다. 이런저런 계책을 내놓지만, 그 중에는 탁월한 계책도 있겠지만, 받아주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들은 추후 '흘러간 옛 노래'이거나 패장의 무용담거리에 부속물쯤이 될 것이다.

후흑의 극치는 "철면피도 아니고 흑심도 없다(不厚不黑)"라고 상대와 대중이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의와 도덕의 옷을 입고, 말은 애매모호해야 한다고 한다. 명백하게 말하면 반드시 발목을 잡히게 되니까. 지금 이러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쩌면 그가 사슴을 잡는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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