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필승" 최근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처세가 입길에 올랐다.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 때문이다. 정 장관은 '사과'하면서 '사퇴'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지조(志操)가 있는 선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지만, 예(禮)와 도(道)에 어긋난다면 '허튼 선비(散儒)'인 것이다./문병희 기자 |
정부부처 개각이나 주요 공직 인사가 나오면 데스크는 기자들에게 인물평을 주문한다. 사람됨됨이에 대한 100자 내외의 촌평(寸評)이다. 독자도 독자지만, 인사대상자도 매우 높은 관심을 기울이는 지면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표현은 되도록 피한다. 기자와 취재원과의 관계도 있으니까.
이런 인물평에도 독법(讀法)이 있다. 예컨대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은 '지나치게 세심하고 사람이 차갑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호방한 성격'은 '주색(酒色)에 능하다'는 뜻일 수 있다. '정곡을 꿰뚫는 언변'은 '아첨'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묘한 표현이 있는데, '갈 때 가고, 멈출 때 멈출 줄 안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추진력과 결단력을 갖췄다는 말로 들린다. 한때 인사대상자들이 좋아하는 평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 뜻은 '고스톱을 잘 친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공직자들과 기자들이 종종 고스톱을 즐기기도 했는데, 실제로 머리 좋고 결단력 있는 일부 공직자들은 출중한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물론 일도 잘했다.
사실 인생에서든, 공직에서든 나아가고 물러설 때를 제때 가늠하고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이는 예로부터 선비의 으뜸 덕목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출사했더라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물러났다.
간혹 "물러나고 싶어도 어지러운 세상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거나 "나라가 부르는데 고사하거나, 간곡하게 붙잡는데 뿌리칠 수 없었다"는 공직자들이 있다. 이름하여 현대판 '북곽(北郭)선생'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호질(虎叱)에 나오는 바로 그 무늬만 선비(儒) 말이다.
한 대목을 옮겨보자. 똥 덩이에 빠진 북곽선생, 호랑이가 구린내 나는 선비의 행태를 꾸짖자 머리를 깊이 조아리고 뇌까린다. "맹자님 말씀에 비록 악인이라도 목욕재계하면 상제(上帝)를 섬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토의 천신은 감히 아랫바람에 서옵니다." 일단 호구(虎口)에서 벗어나려는 심산이다. 그런데 하회를 기다렸으나 아무 동정이 없다.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 우러러보니 범은 간 곳이 없고, 동이 트자마자 밭 갈러 나온 농부가 묻는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어가 없다" 최근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당에서는 "주어가 없다"고 했다. "주어가 없다"는 말은 그냥 "총선 필승"이라고 했지, "새누리당 총선 필승"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문병희 기자 |
이 때의 대답이 걸작이다. 북곽선생은 짐짓 엄숙히 매무새를 고치고 말한다. "성현의 말씀에 하늘이 높다 해도 머리를 아니 굽힐 수 없고, 땅이 두텁다 해도 조심스럽게 닫지 않을 수 없다 하셨느니라." 목숨을 구하려 구차하게 부복(俯伏)하고는, 그런 꼴이 들키자 성현의 가르침을 끌어대는 것이다. 유학(儒學)이 아니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유학(諛學)'이다. 요즘 공직자와 어쩜 그렇게 꼭 닮았는가.
최근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처세가 입길에 올랐다.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 때문이다. 처음에는 "덕담이다"고 했고, 당에서는 "주어가 없다"고 했다. "주어가 없다"는 말은 그냥 "총선 필승"이라고 했지, "새누리당 총선 필승"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 장관은 장관으로선 보기 드물게 명망이 있는 학자 출신이다. 그것도 헌법학자이다. 헌법을 연구하고 가르친 그가 자신의 발언이 헌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몰랐을까. 몰랐다면 무능이고, 알았다면 배덕(背德)이다. 아니면 학자적 양심(良心)이 장관이 되면서 양심(兩心)이라도 된 것일까.
순자(荀子)는 '할 말은 하는 공직자'를 강조했다. 군자필변(君子必辯), 군자는 반드시 변론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묶은 포대자루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허물도 없지만 영예로운 일도 없다(括囊,無咎無譽)"고 했다. 그렇다고 막말은 안 된다. 비록 청산유수일지라도 허튼소리일 뿐이다. 다만 백성을 위한 논변이라야 한다. 백성을 위하지 않은 논변은 정치의 가장 큰 재앙이라고 단언했다. 궤변(詭辯)은 난세(亂世)를 부르고, 사람다운 사람의 말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그런데 정 장관은 '사과'하면서 '사퇴'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지조(志操)가 있는 선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지만, 예(禮)와 도(道)에 어긋난다면 '허튼 선비(散儒)'인 것이다. 선비란 무엇인가. 선비정신은 인간으로서 떳떳한 도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지켜내는 지조를 일이관지(一以貫之) 간직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도 중요하지만, 억강부약(抑强扶弱)이 핵심이다.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부추기는 것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부강억약(扶强抑弱)은 아닌가.
'못 먹어도 고?' 정부부처 개각이나 주요 공직 인사가 나오면 데스크는 기자들에게 인물평을 주문한다. 묘한 표현이 있는데, '갈 때 가고, 멈출 때 멈출 줄 안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추진력과 결단력을 갖췄다는 말로 들린다. 한때 인사대상자들이 좋아하는 평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 뜻은 '고스톱을 잘 친다'는 것이었다./문병희 기자 |
조선의 선비는 외유내강(外柔內剛)에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추구했다. 위기에 처해서는 지조를 지키는 기개를 보이지만, 평상시에는 온화한 사람, 그러면서 이기심과 욕망을 이겨내고 대동사회로서 공생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다. 요즘 공직자들은 과연 그런가. 과연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한 박기후인(薄己厚人) 정신은 있는가.
그럼에도 조무제 전 대법관 같은 '선비'가 있어서 후텁지근한 우리 사회에 한 자락 청량한 바람을 선사한다. 그는 1993년 첫 공직자 재산신고 때 25평 아파트와 예금을 합쳐 6434만 원 뿐이었다. 5년 후 대법관으로 선임될 때도 7200만원에 불과했다. 2004년 퇴임 후 로펌으로 가지도 않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없는 살림에도 장학금을 기부하고, 청빈하게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역시 물 흐르는 대로 가는 '법(法)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른가.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이 좀더 자신에 엄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명경인(一鳴驚人)'이란 말로 주색에 빠진 제나라 왕을 깨우쳤던 순우곤(淳于髡)의 가르침 중 필자가 좋아하는 대목이 있다. "술이 지나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도 지나치면 슬퍼진다." 좋은 자리가 항상 좋지 않고, 나쁜 선택이 항상 나쁜 게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지조(志操)야말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선비의 참모습이 아닌가.
주역의 간(艮) 괘는 '멈춤의 도'를 가르친다. "돈간 길(敦艮 吉)"이라 했다. 멈춤과 그침의 도를 깨우쳐 종당에는 그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나아갈 때와 멈춰 설 때를 아는 것을 넘어서서 '감'과 '섬'이 하나가 된 경지다. 나아가도 멈춰있고, 그쳐도 진행되는 상태. 멈춤의 본질을 꿰뚫고 확장하고 두텁게 한 상태. 이것이 '돈간(敦艮)'이며, 그래서 길(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경 받던 학자출신 장관의 안타까운 처신을 보며 주역의 괘를 하나 뽑아봤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