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회 입성기] ‘봉제공장 봉봉이’ 은수미 새정치연합 의원
입력: 2015.08.27 12:15 / 수정: 2015.08.27 12:15

은수미 새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노동전문가다. 그는 여의도 국회 입성 후에도 늘 노동자들의 곁을 지켰다. 은 의원의 노동 운동 당시 모습. /은수미 의원실 제공
은수미 새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노동전문가다. 그는 여의도 국회 입성 후에도 늘 노동자들의 곁을 지켰다. 은 의원의 노동 운동 당시 모습. /은수미 의원실 제공

서울 여의도 1번지 국회. 시기와 성향은 다르지만 298명의 의원이 입성했다. 큰 틀에서 소명은 같다.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과 고민은 천차만별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어떤 꿈을 가슴에 품었을까. <더팩트>는 이들의 '국회 입성기'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은수미(52·비례대표·을지로위원회 기획분과장·환경노동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언제나 ‘을(乙)’의 편이다. 거리 노동자의 땀과 눈물 그리고 울분을 늘 곁에서 닦아주며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의 겉모습은 유약한 여성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외모로 그렇게 판단한다면 큰 ‘오판’이다. 은 의원은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이다. 그의 여의도 국회 입성 또한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지만 이런 성품이 크게 작용했다.

2012년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근무할 당시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정치 비례의원으로 넣겠다는 전화였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비례의원 순위 3번을 받고 여의도 국회에 입성했다. 노동분야의 전공을 살려 국회 활동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우연히 국회에 입성했지만, 그의 삶을 보면 또 우연도 아니다.

여의도 국회에 입성한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노동’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 왜 노동 분야였을까.

은 의원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해병대 장교였던 아버지 덕으로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은수미 의원실 제공
은 의원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해병대 장교였던 아버지 덕으로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은수미 의원실 제공

사실 그가 자란 환경만 놓고 보면 지금의 모습과 상당히 배치된다.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해병대 장교였고, 집안은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겼고, 발레를 보러 공연장을 찾을 정도였으니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는 또래의 친구들도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장난으로 밀쳐서 넘어지며 벽에 부딪혔는데, 벽이 무너지더라. 판잣집이었다. 사실 그런 생활 수준의 격차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었다. 중학 시절에는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집을 방문했더니 흙벽이 있는 집에 세를 살고 있더라. 매우 충격을 받았다.”

어린 시절의 이 경험은 그가 정치적 인식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됐다. 어린 머릿속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격차가 큰가?’라는 풀리지 않는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은 의원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을 정도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본인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부모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을 반기지 않았다.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 은 의원은 복장 하나로 선배와 동기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비쳤다.

은 의원의 학창시절 모습.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 은수미 의원실 제공
은 의원의 학창시절 모습.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 은수미 의원실 제공

그러나 학생들의 손가락질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무서워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그는 일련의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학생운동에 몸을 던지게 된다.

“한 번은 학교에서 5월에 데모를 하는 데 참여했다. 하지만 최루탄 한 방이 터지니 백 미터 달리기 하듯 총알같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용서하기 힘들었다. 또 1983년 11월 8일 당시 도시공학과 4학년 황정하 학생이 도서관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전경이 달려들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나 자신이 너무나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본 부모는 유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부모는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그의 성격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은 의원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학교에 갈 수 없던 그가 선택한 곳은 ‘봉제공장’이었다. 그가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곳이다. 당시 그는 수미란 이름이 아닌 ‘이봉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때 유행한 ‘봉봉 오렌지 주스’의 이름을 따 사람들은 그를 ‘봉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재봉 일을 하던 그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 개선을 위해 유인물을 뿌리다 걸려 작업복을 입은 채로 붙잡혀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만약 이때 은 의원이 반성문을 썼다면 구속 기간은 훨씬 짧았겠지만, 그는 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2012년 국회에 입성한 은 의원은 누구보다 노동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은수미 의원실 제공
2012년 국회에 입성한 은 의원은 누구보다 노동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은수미 의원실 제공

은 의원은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강릉교소에서 6년간 복역했다. ‘사노맹(남한사회주의자노동자연맹)’ 사건 때문이다. 사노맹 사건은 혁명적 좌파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을 국가안전기획부가 일제히 구속 및 수배했던 사건이다. 그는 이때 목의 종양 제거수술과 결핵균이 퍼진 장을 50cm나 잘라내는 등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모진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그가 돌아간 곳은 학교였다. 이 시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 석사, 박사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이후 한국노동연구원에 입사해 노동연구에 매진했고 그의 노력과 업적을 평가받아 2012년 5월 여의도 국회에 입성했다.

“정치는 타협이라고 하는데 난, 정치에서 타협은 테크닉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 테크닉으로 바라봐야 하나. 내 정치는 자신의 고통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고통에 분노하는 것이다.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면 끈질겨진다. 이 고통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고 덜어주고 싶다.”

은 의원은 초선비례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가지려 하고 있다. 나름 노력했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이 사회에 좀 더 강한 힘으로 도전하기 위해서다. 은 의원은 힘을 가지려고 2016년 총선을 준비 중이다. 은 의원은 경기도 성남 중원구에서 여의도 재입성을 위한 터전을 일구고 있다.

“이제는 힘을 갖고 싶어졌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세월호 가족들의 고통, 비정규직들의 고통, 그런 고통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고통, 이런 고통이 가득 차 있는 현실을 이제는 더는 못 봐주겠다. 너무 불합리하고, 너무 부조리하다. 이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고, 그 소리에 반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더팩트 ㅣ 이철영 기자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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