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무궁화와 사쿠라의 차이
입력: 2015.08.10 11:11 / 수정: 2015.08.10 11:11
사쿠라의 마음을 ‘사심’이라 표현하면, 사심이야 한꺼번에 마음을 비우는 ‘사심(捨心)’도 있지만 ‘사심(蛇心)’과 ‘사심(邪心)’도 있다. 마음을 버리는 것이 비우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초지(初志)도 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서울신문 제공
사쿠라의 마음을 ‘사심’이라 표현하면, 사심이야 한꺼번에 마음을 비우는 ‘사심(捨心)’도 있지만 ‘사심(蛇心)’과 ‘사심(邪心)’도 있다. 마음을 버리는 것이 비우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초지(初志)도 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서울신문 제공

세월 앞에 버틸 장사가 없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입추(立秋) 앞에 별 수 있겠는가. 녹음방초(綠陰芳草)가 꽃보다 아름다운 여름이라지만, 한로삭풍(寒露朔風)에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黃菊丹楓)의 가을은 어떠한가. 아직 밤낮으로 매미소리 요란하지만,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 스러질 운명이다.

매미 같은 하충(夏蟲)에게 절개(節槪)를 이야기하는 것은 쇠 귀에 경 읽기(牛耳讀經)일 것이다. 장자(莊子)도 말했다. 본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고,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할 수 없으며, 굽은 선비에게 도(道)를 말할 수 없다고. 우물 안 개구리는 장소에, 여름 벌레는 때에, 굽은 선비는 자신이 배운 알량한 지식에 각각 매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井蛙)와 여름 벌레(夏蟲)와 굽은 선비(曲士)는 그 근본이 같은 것이다.

모두에 ‘사철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합궁딱궁딱딱궁궁척궁궁궁’ 12박자 중중모리 장단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인생사를 담은 단가(短歌) 말이다. ‘이 산 저 산~’으로 시작하는 가사는 말미에 딱 세 부류의 인간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자고 제안한다. 바로 ‘국곡투식하는 놈과 부모불효 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이다. 국곡투식(國穀偸食)은 나라 곡식을 훔쳐 먹는다는 뜻이니 현대적 의미로는 ‘세금도둑 공무원’쯤이다.

그런데 이들 세 부류를 솎아내기가 어디 쉬운가. 공무원은 말 그대로 텅 비고(空), 영혼도 없으면서(無), 동그라미(圓)만 바라지 않는가. 롯데그룹 가족상쟁(家族相爭)에서 보듯이 움켜 쥔 자들이 인성(人性) 결핍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을 아무리 잘 차려도, 생전에 술 한잔 올리는 것만 못하다(死後之滿盤佳肴 不如生前一杯酒)고 하는데도 아랑곳 없다. 그야말로 자산이 있어도 꼿꼿한 마음의 중심이 없는 유산무항심(有産無恒心)의 전형적인 소인배 아닌가.

공자 왈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자이며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고 했다. 비유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지금 부자와 소위 귀하신 몸이 존경의 대상인가. 부러움과 질시(嫉視)는 있을지언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나라에 도(道)가 사라졌다는 방증으로 봐도 무방한가.

롯데그룹 가족상쟁(家族相爭)에서 보듯이 움켜 쥔 자들이 인성(人性) 결핍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을 아무리 잘 차려도, 생전에 술 한잔 올리는 것만 못하다(死後之滿盤佳肴 不如生前一杯酒)고 하는데도 아랑곳 없다. 그야말로 자산이 있어도 꼿꼿한 마음의 중심이 없는 유산무항심(有産無恒心)의 전형적인 소인배 아닌가. / 더팩트 DB
롯데그룹 가족상쟁(家族相爭)에서 보듯이 움켜 쥔 자들이 인성(人性) 결핍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을 아무리 잘 차려도, 생전에 술 한잔 올리는 것만 못하다(死後之滿盤佳肴 不如生前一杯酒)고 하는데도 아랑곳 없다. 그야말로 자산이 있어도 꼿꼿한 마음의 중심이 없는 유산무항심(有産無恒心)의 전형적인 소인배 아닌가. / 더팩트 DB

이들에게 논어(논어)의 계씨(季氏) 구사(九思)편을 전한들 마이동풍(馬耳東風) 아닐까. “볼 때는 밝음, 들을 때는 총명함, 얼굴빛은 온화함, 용모는 공손함, 말은 충성스러움, 일은 경건함, 의심스러운 것은 물음, 분함에는 어려움, 얻을 것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고 했다. 여기서 마지막 생각, 견물생심(見物生心)인데 이 때 의로움(見得思義)을 생각하는 것이 과연 이들에게 가능하긴 한 것인가.

‘쑥이 삼 가운데 나면 북돋아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지만, 쑥대밭 안에서야 쑥이 그저 쑥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명창 임방울 선생의 더늠으로 유명한 ‘쑥대머리’는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뜻하는데, 겉이 번지르르하면 대신 속이 귀신형용(鬼神形容)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비관할 수만은 없다.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지만,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한 사람의 바탕(善人者 不善人之師也, 不善人者 善人之資也)”이라고 노자(老子)도 말하지 않았나. 그저 착한 사람은 스승으로 삼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바탕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욕하면서 닮지만 않으면 될 터이다.

요즘 무궁화 꽃이 한창이다. 무궁화는 이름처럼 피고지고 또 피어 무궁화(無窮花)란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피고지는 군자의 나라’로 지칭했고, 신라시대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도 ‘근화지향(槿花之鄕)’, 곧 무궁화나라라 자처했다. 애국가도 그래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다.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우리의 정서와 꼭 맞는다. 그런데 ‘피고지고 또 피는’ 것이 ‘은근과 끈기’일 수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비치기도 한다.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우리의 정서와 꼭 맞는다. 그런데 ‘피고지고 또 피는’ 것이 ‘은근과 끈기’일 수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비치기도 한다./ 문병희 기자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우리의 정서와 꼭 맞는다. 그런데 ‘피고지고 또 피는’ 것이 ‘은근과 끈기’일 수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비치기도 한다./ 문병희 기자

맹교(孟郊)의 시 ‘심교(審交)’를 보자. ‘군자는 향기로운 계수나무의 본성 같아/봄에는 향기 짙고 가을에 또 번성하네/소인은 무궁화 꽃과 같은 마음이라/아침에 있던 것이 저녁에는 사라지네(君子芳桂性,春濃秋更繁,小人槿花心, 朝在夕不存),’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이러한 무궁화의 마음, 즉 근심(槿心)을 ‘손바닥 뒤집어 구름과 비를 만드는(飜手作雲覆手雨)’ 가벼움으로 비유한 것이다.

최근 한일관계의 걸림돌로 등장한 일본의 역사관과 사죄 문제도 바로 나라를 상징하는 꽃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일본의 국화는 벚꽃인데, 한꺼번에 피었다가 무리 지어 진다. 일본식 표현으로 ‘앗싸리’한 것이다. 그래서 한일관계도 65년 한일협정 때 이미 과거사와 관련 배상을 마친 것 아니냐, 자기네 천황도 ‘통석(痛惜)의 념’을 밝혔고, 무라야먀와 고노가 사죄하지 않았냐, 따라서 이미 정리된 일인데 왜 계속 사죄하라고 하느냐, 언제까지 계속 사과하란 것이냐 하는 볼멘소리의 근저에 이런 ‘사쿠라’식 의식체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무궁화다. 피고지고 또 핀다. 은근과 끈기다. 사과할 일이 있으면 백 번이라도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한일협정에서 위안부 이야기는 없었지 않으냐, ‘통석의 념’이 사죄냐, 무라야마도 고도도 사죄했는데 왜 아베는 안 하느냐, 사죄해라, 또 사죄해라, 독일도 유태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냐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근저에 이런 ‘무궁화’식 의식체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근심(槿心)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지만,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피어난다. 우리는 이를 은근과 끈기로 보지만, 나쁘게 보는 쪽은 ‘뒤끝 작렬’로 여긴다. 우리는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보지만, 다른 이는 아침과 저녁이 다른(朝在夕不存) ‘양심(兩心)’으로 여기기도 한다. 양심(良心) 아닌 양심불량(兩心不良)이다.

사쿠라의 마음을 ‘사심’이라 표현하면, 사심이야 한꺼번에 마음을 비우는 ‘사심(捨心)’도 있지만 ‘사심(蛇心)’과 ‘사심(邪心)’도 있다. 마음을 버리는 것이 비우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초지(初志)도 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이나 사안에는 서로 정반대의 측면이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태양이 밝으면 그림자는 더욱 어두운 법이 아닌가. 근심(槿心)도 근심과 걱정이 아니라 근심(謹審)과 가까웠으면 좋겠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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