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가만히 있어라" vs "알아서 하겠다"
입력: 2015.06.08 11:55 / 수정: 2015.06.08 11:55
국가를 믿지 못하는 국민 세월호에 이어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 사태에 정부의 태도는 가만히 있어라는 것이었다. 이에 국민들이 정부는 가만히 있어라며 나선 상황이다.  스스로 메르스 병원지도와 대처 방안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임영무 기자
'국가를 믿지 못하는 국민' 세월호에 이어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 사태에 정부의 태도는 "가만히 있어라"는 것이었다. 이에 국민들이 "정부는 가만히 있어라"며 나선 상황이다. 스스로 메르스 병원지도와 대처 방안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임영무 기자

확산하는 메르스 공포만큼 정부에 대한 불신도 깊어져

"가만히 있어라." 짧지만 강렬한 어구이다. 여기엔 무한한 신뢰, 고양된 경륜, 묵직한 권위가 배어 있다. 백성은 그저 지시를 잘 따르면 된다. 그러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이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요순정치의 요체일지 모른다. 위에서 알아서 다 하는 것이다. 백성은 그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면 된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이다.

임금이 있지만, 백성은 느끼지 못한다. 성인의 '무위지치(無爲之治)' 때문이다. 굳이 스스로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스림은 공기처럼 물처럼 '느끼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해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 갈아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혜택이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帝力于我何有哉).' 요(堯)시대에 불렸다는 격앙가(擊壤歌)이다.

태평성대는 이렇게 드러남이 없이 빛난다. 마치 깊고 오묘하며 아득하면서도 오묘하고 검게 빛나는 덕, 현덕(玄德)처럼 말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한데,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이다"고 시작한다. 여기에 '가정' 대신 '시대'를 대입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복한 시대는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시대는 불행한 이유가 저마다 다르다."

작금 시대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글의 첫 구절을 다시 보자. "가만히 있어라." 이 말에 신뢰와 경륜과 권위가 배어 있다면, 아마도 태평성대까지는 몰라도 치세(治世)쯤은 될 것이다. 그러나 불신과 무능과 불통이 배어 있다면 바로 난세(亂世)라는 뜻이다.

세월호에 이어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 사태에 정부의 태도는 "가만히 있어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알아서 역병의 확산을 막을 테니, 국민은 알려고도 궁금해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눈 앞에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304명의 꽃다운 생명이 그대로 수장되는 모습이 선하다. 그 정신적 외상(外傷)은 해가 바뀌어도 정부와 야당의 '처방전' 싸움에 약을 써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갈수록 커지는 메르스 공포 알아서 하겠다 역시 짧지만 강렬한 어구이다. 여기엔 끝없는 불신, 측량 불가능한 무능, 고래힘줄보다 질긴 고집불통에 대한 체념이다./문병희 기자
'갈수록 커지는 메르스 공포' "알아서 하겠다" 역시 짧지만 강렬한 어구이다. 여기엔 끝없는 불신, 측량 불가능한 무능, 고래힘줄보다 질긴 고집불통에 대한 체념이다./문병희 기자

이에 국민들이 "정부는 가만히 있어라"며 나선 상황이다. MERS의 진원지가 된 병원이든, 본의 아니게 수십 명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린 '수퍼 전파자'든 비공개원칙만 고수하자 스스로 메르스 병원지도와 대처 방안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알아서 하겠다" 역시 짧지만 강렬한 어구이다. 여기엔 끝없는 불신, 측량 불가능한 무능, 고래힘줄보다 질긴 고집불통에 대한 체념이다. 정부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세금으로 녹봉이나 챙기라는 얘기다. 무엇이라도 하면 오히려 덧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소통'과 '문민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신문의 역할을 요즘은 방송과 인터넷과 SNS가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국민은 SNS를 통해 LTE의 속도로 소통하고 있다. 정부가 비밀주의를 내세우며 "가만히 있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지성 시대에 그런 알량한 비밀이 지켜지겠는가. 정부가 "절대로 안 된다"던 병원명단 공개를 최경환 총리대행이 강행한 것은, 그것도 병원 명이 틀리는 부실한 상태에서 발표를 서두른 것은 자칫 정부의 존재가 부정되는 상황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비공개원칙과 비밀주의를 고수하는데도 국민들이 집단지성과 SNS를 통해 정부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태를 판단하는 지경에 이르면, 과연 이 정부는 존재의 의미가 있느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경환 총리대행의 '뒷북 공개'는 사실상 정부가 부정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자구책 측면이 강하다.

사실 작금의 시대는 간접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가 접목하는 중이다. 과거 소통의 범위가 제한적이고 속도도 느릴 때 대의민주주의가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호오(好惡)과 지지여부는 실시간 공유된다. 네트워크 시대에 피라미드형 꼭지점은 느림과 독선과 불통이다. 지금 세상의 키워드는 공개와 공유가 아닌가. 그런데 IT 천국이라는 한국에서 공개가 아닌 비공개원칙, 공유가 아닌 정부 독점적 비밀주의가 가당한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현실에 대한 무지이자 무능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붙였다면 독선과 불통이 아니겠나.

인체는 항체를 만든다 모든 바이러스나 세균에 맞서 인체는 항체(抗體)를 만든다. , 독선과 불통이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싸울 항체도 만들고, 나아가 투표와 선거 과정에서 예방 백신도 놓을 것이다./남윤호 기자
'인체는 항체를 만든다' 모든 바이러스나 세균에 맞서 인체는 '항체(抗體)'를 만든다. , 독선과 불통이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싸울 항체도 만들고, 나아가 투표와 선거 과정에서 예방 백신도 놓을 것이다./남윤호 기자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자연치유'이다. 모든 바이러스나 세균에 맞서 인체는 '항체(抗體)'를 만든다. 동일한 질병에 대한 면역의 첫 관문이다. 현대의 의료과학은 이를 이용해 예방 백신도 만든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도 '항체'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책임지지 않는 무능함, 터무니없는 비밀주의, 독선과 불통이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싸울 항체도 만들고, 나아가 투표와 선거 과정에서 예방 백신도 놓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무능함에도, 비밀주의에도, 독선과 불통에도 그저 "그러려니"하는 면역성만 생기는 것은 아닐까.

메르스가 창궐 직전인데, 정쟁은 계속된다. 마치 메르스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도 분열하는, 적전분열(敵前分裂) 양상이다. 얼핏 불요불급해 보이는 국무총리 후보 청문회도 뒤로 미루지 않는다. 하기야 한국전쟁 와중에 발췌개헌도 하고, 선거도 하지 않았나. 정관정요를 보면 당(唐) 태종의 인사기준이 나온다. "정직한 인재를 기용하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권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잘못 기용하면 사악한 자들이 다투어 나오게 돼 있다. 사람을 기용할 때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이다. 경솔히 사람을 쓸 수 없다."

이에 위징이 답한다. "사람을 제대로 아는 지인(知人)은 예로부터 매우 어렵다. 인재를 구하려면 먼저 품행을 엄히 살펴야 한다. 품행이 훌륭하면 설령 어떤 일을 능숙히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큰 허물은 없다. 하지만 악인을 기용하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재간이 있을지라도 커다란 해(害)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재능만을 요구하면서 덕행 여부는 돌아보지 않는 것은 난세(亂世)를 초래한다."

덕행이 없는 재능은 난세를 부르고, 재덕이 겸비하면 치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과연 현 정부는 난세를 향해 가고 있나, 치세를 향해 가고 있나. 인재의 등용을 보면 알 수 있다는데, 덕행보다 능력 위주, 그것도 그 나물에 그 밥, 회전문 인사에 국민들 눈에는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다. 참, 두드러기는 한자로 '담마진'이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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