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어지러운 4월, '껍데기는 가라!'
입력: 2015.04.20 10:39 / 수정: 2015.04.20 10:39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 혁명(革命)은 이처럼 하늘의 뜻을 바꾼다는 의미이다. 독재(獨裁)로 정체된 사회는 필시 대중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새로운 체제로 이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다.  /더팩트 DB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 혁명(革命)은 이처럼 하늘의 뜻을 바꾼다는 의미이다. 독재(獨裁)로 정체된 사회는 필시 대중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새로운 체제로 이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다. /더팩트 DB

혁명에는 이름이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시민의 권리를 무혈로 쟁취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영어로는 '글로리어스 레벌루션(Glorious Revolution)'이다. 프랑스대혁명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 나라 이름과 함께 '대(大)'자가 붙여졌다.

2000년대 구 소련의 동토(凍土)는 한 송이 꽃에 녹아버렸다. 2003년 조지아(구 그루지야) 민주화는 장미꽃을 든 시민들이 쟁취했다. 그래서 '장미혁명'으로 불린다. 본디 감염성이 강하고 거센 바람에 실려 확산하는 게 혁명이다. 더욱이 꽃 향기는 주머니에 싸도 10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2005년 키르기즈스탄 시민들은 '튤립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룬다. 앞서 우크라이나에는 '오렌지혁명'이 일어났다. 오렌지 빛깔의 옷과 목도리와 깃발로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다.

혁명의 꽃 바람은 아프리카 사막으로 번졌다.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났던 반정부 시위는 '재스민혁명'으로 명명됐다. 재스민은 물푸레나무과(科)의 영춘화(迎春花)이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란 이름대로 얼어붙은 독재의 땅에 민주화의 꽃을 피운 셈이다. 단단한 얼음은 송곳에 쪼개지고, 두꺼운 눈 더미도 한줄기 봄바람에 사라지는 법이다. 재스민 향기가 이집트로 번져 무바라크를 퇴진시키고, 리비아 카다피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민주화의 꽃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휘말려 피는 듯, 시드는 듯 아리송한 상황이긴 하다.

본디 역사는 '이름 붙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네 혁명은 이름이 매우 가치중립적이다. 그저 날짜로만 불린다. 대표적으로 4·19가 그렇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의 국체를 설명하는 헌법 전문인데, 4·19에 대해서는 혁명인지, 운동인지, 의거(義擧)인지 평가도 이름도 없다.

어제는 4·19혁명 55주년이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4·19정신' '4·19기념식' '4·19유공자' 등으로 보도했다. '국립4·19민주묘지'도 '4·19묘소'로 쓴 곳도 있다. '혁명'이란 용어를 굳이(아마도 습관적으로) 붙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이는 권력의 주체에 따라 성격 규정이 달라져온 어두운 기억 때문일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는 한때 혁명으로 불렸다. 이 쿠데타 주역들은 자신의 정부전복행위를 혁명으로 미화하기 위해 4·19를 '학생의거'로 깎아 내렸다. 세월이 흘러 4·19는 학생의거에서 혁명으로, 5·16은 혁명에서 군사쿠데타로 각각 제 이름을 되찾았다. 물론 아직도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그래서 김종필은 '불세출의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혁명의 힘 본디 역사는 이름 붙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네 혁명은 이름이 매우 가치중립적이다. 그저 날짜로만 불린다. 대표적으로 4·19가 그렇다. /더팩트 DB
'민주주의는 혁명의 힘' 본디 역사는 '이름 붙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네 혁명은 이름이 매우 가치중립적이다. 그저 날짜로만 불린다. 대표적으로 4·19가 그렇다. /더팩트 DB

마르크스는 혁명을 '역사의 기관차'라고 했다. 대중적 세력에 의해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역사가 한층 더 높은 단계를 획득하기 때문이란다. 이 관점에서 혁명은 '쿠데타'와 전혀 다르다. 쿠데타는 정치의 상층부에 한정된 폭력적 권력의 이동에 불과하다. 같은 계급의 개인 혹은 집단 사이의 교체 내지는 소수 인간의 맹동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회의 기초인 경제 관계를 변혁함과 아울러 상부구조의 변혁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흐르던 물이 정체(停滯)되면 썩는다. 여기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폭기(瀑氣)장치가 필요하다. 물을 뒤집음으로써 용존 산소량을 늘리는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일 터다. 독재(獨裁)로 정체된 사회는 필시 대중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새로운 체제로 이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다.

동양에서 혁명(革命)은 무엇인가. 바로 천명(天命)을 바꾸는(革)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孟子)에게 묻는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弑害)해도 되는가." 맹자가 답한다. "인(仁)을 해치면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면 잔(殘)이라 한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부(一夫)라 한다." 왕이 아니라 그저 필부(匹夫)를 참하였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을 내세워 은(殷)의 탕왕(湯王)이 걸(桀)을, 주(周)의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고 나라를 세운 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려 했고, 순자는 구분하려 했으며,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결론지은 반면, 맹자는 회복(回復)하려 한 것이다.

혁명(革命)은 이처럼 하늘의 뜻을 바꾼다는 의미이다. 탕무(湯武)의 유혈 혁명은 방벌(放伐), 요순우(堯舜禹)로 이어지는 무혈 혁명은 선양(禪讓)이라 한다. 요즘으로 보면 '방벌'은 성난 시민들에 의한 급작스런 정권교체, '선양'은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쯤일 것이다.

영국의 런던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어두운 전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유혈혁명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한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19혁명을 '낡은 것, 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라고 했다. 자유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와 관존민비(官尊民卑)·남존여비(男尊女卑) 같은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그래서 사회적 민주주의의 맹아를 터뜨린 '정신혁명'이라는 평가다.

어지러운 4월 4월의 정신은 민주주의이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주주의가 횃불로 밝혀지고, 요원의 들불처럼 번지길 기원한다./임영무 기자
'어지러운 4월' 4월의 정신은 민주주의이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주주의가 횃불로 밝혀지고, 요원의 들불처럼 번지길 기원한다./임영무 기자

물론 이론(異論)도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학생과 시민이 흘린 피의 수혜자인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계승자라기 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권력에서 배제된 보수적인 집단이었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未完)의 혁명'"이라 평가했다.

과도내각 수반이었던 허정은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義擧)였지, 혁명은 아니다"며 '사태(事態)'라고 평가했다.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이다.

여하튼 곡절의 세월을 거쳐 4·19는 '4월혁명'으로 자리매김됐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 하늘을 순종하면 흥하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순덕자창 역덕자망(順德者昌 逆德者亡)', 덕을 따르면 창대해지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말인데, 결국 같은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는(獲罪於天 無所禱也) 것이다.

다시 어지러운 4월이다. 역천(逆天)과 역덕(逆德)이 난무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당당하게(?) 나무란다. 잔인한 4월이지만, 밤새 비바람에 꽃이 지고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희망(希望)의 원래 뜻은 '멀리 바라봄'이다. '희(希)'의 쓰임새가 논어(論語)에서는 드물다, 문선(文選)에서는 허공이란 의미였다. 노자는 '희(希)'를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하다'고 했다. '청지불문(聽之不聞)'으로,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상태다. 어쩌면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희망일지도 모른다.
시인 정연복은 '희망'에서 '바람에 지는 꽃잎을/서러워하지 말자/꽃잎이 떨어진 그 자리에/열매의 속살을 돋으리'라고 했다. 어쩌면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4월의 정신은 민주주의이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민주주의가 횃불로 밝혀지고, 요원의 들불처럼 번지길 기원하며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다시 읊는다.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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